"시장아저씨, 오줌마려워요"…박원순의 북한산 '민원산행'

때마침 종로구 등산연합회의 산행이 예정된 터라 수백명의 등산객들이 북한산을 오르기 위해 운집해 있었다.
산행소식을 들었는지 민주당 정세균 최고위원과 한나라당 박진 의원이 검정색 승용차를 몰고 와 수행원들을 대동한 채 등산객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눴다.
정 최고위원과 박 의원이 자리를 뜬 지 30여분 뒤인 오전 10시께 박원순 서울시장이 수행비서 김준호씨가 몰고온 베이지색 SM5승용차에서 몸을 내렸다.
등산객들 속에 섞여있던 20여명의 남녀가 박 시장을 둘러쌌다.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와 달리 떠들썩한 환호는 없었다. 다만 오랜 벗처럼 박 시장과 다정히 어깨를 나란히 하며 스마트폰으로 '인증샷'을 찍었다.
이들은 박 시장에게 '번개등산'를 제안 받은 사람들이었다.
박 시장은 전날 오후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가 주최한 당선 뒤풀이 행사에 예고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12일 오전 10시 이북 5도청 앞에서 북한산 '번개 등반'을 하자"고 시민들에게 제안했다.
트위터 등을 통해 소식은 퍼졌고, 박 시장이 좋아 곁에서 보고 싶은 사람들이 산행에 동참하게 됐다. 기자 4~5명도 트위터를 보고 박 시장을 따랐다.
남색 점퍼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박 시장은 "딸이 쓰던 것"이라는 연두색 배낭을 둘러멨다.
등산화끈을 조여 맨 박 시장은 "안철수 교수를 만나기 전날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고 내려왔다"며 "두달만인가 처음으로 산을 찾았다. 이곳 코스만 수백번을 왔다갔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시장은 "1년에 2번 지리산 종주를 해왔다"며 "여름에는 아름다운 재단 직원들과 했고, 연말 종주도 했는데 금년에는 제야의 종소리 타종 때문에 못 간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자신을 있게 한 셈이 된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제야의 종을 타종했었다"는 웃지못할 일화도 전했다.
박 시장의 곁은 어린이들의 몫이었다. 부모 주봉철(39), 김현정(39·여)씨를 따라온 유림(8)양과 민성(9)군, 어머니 구은정(39)씨와 함께 온 조모군이 차례로 박 시장과 손을 잡고 산을 올랐다.
박 시장은 산행 도중 아이들에게 쓰러져가던 소나무가 돌담에 의지해 다시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는 것을 가리키며 "담을 쌓은 사람이 인간적이지 않니? 자연에 맞춰서 담을 쌓은 거야. 나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힘들지만 이렇게 적응해가면서 사는 거야. 신기하지?"라고 말했다.
집무실 공사로 인해 모처럼 휴식 차 산을 찾았다지만 박 시장을 알아본 등산객들이 제각각 민원을 쏟아내는 통에 시정업무는 연장된 듯했다.
박 시장은 이에 개의치 않고 그때마다 발걸음을 멈추고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간판업을 한다는 이로부터는 간판규제에 따른 애로사항을, 은평구에 살고 있는 이에게서는 주거문제에 대한 어려움을 경청했다. 한 등산객은 엉뚱하게 "국회 정문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해 주변의 웃음을 자아냈다.
가장 많은 민원을 쏟아낸 것은 아이들이었다. 궁금한 게 많은 아이들은 박 시장 곁에서 쉼 없이 이것저것 물었다. 박 시장은 아이들이 정해진 등산로를 벗어나 다른 길을 가자고 조르면 웃으며 그 뜻을 따랐다.
조군이 "아저씨, 오줌 마렵다"고 보채자 박 시장은 북한산 관리사무소측 직원에게 '볼일'을 볼 수 있도록 부탁하고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나꼼수 콘서트' 등을 통해 모두 3차례 박 시장을 직접 봤다는 조군의 어머니 구은정씨는 "이렇게 아이와 가까이서 시장님을 보니까 정말 좋다"고 흐뭇해했다.

박 시장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취임 이래 주말도 없이 연일 계속되는 업무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전날 밤 폭음으로 인한 숙취로 골골대는 기자에게는 등산스틱을 건네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이날 산행의 난코스인 딸깍고개를 목전에 두고 일행과 잠시 휴식을 취한 자리에서 박 시장은 과열된 우리나라의 교육현실 등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박 시장은 "A대 법대를 졸업하고 나서 판사가 되어서도 '엄마, 어떻게 판결해요'"라고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며 우리나라의 획일화된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은 무조건 놀아야 한다. 제 부모님도 어릴 때 제게 무조건 공부하라고 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다 한다"며 아이들에게 "무조건은 공부하지 마"라고 말했다.
미래의 꿈을 말하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저서 '세상을 바꾸는 천개의 직업'을 소개하며 "하나를 골라보라"고 말했다.
유림양은 답례로 박 시장의 머리카락에 묻은 잡티를 손으로 집어냈다. 머리숱이 적은 박 시장에게 솔잎을 머리핀처럼 꽂아주기도 했다.
낮 12시께 목적지인 비봉(560m)에 도착하자 서울과 경기도에서 온 등산동호회원 수백명이 박 시장의 등장을 반겼다.
이들은 10여명씩 박 시장과 사진촬영을 하며 "시정을 잘 펼쳐달라", "초심 변치 말라"고 각자의 바람을 전했다.
비봉 아래 공터에 일행과 자리를 튼 박 시장은 배낭에서 직접 샀다는 호박전과 부추전, 계란말이, 김밥을 꺼냈다. 일행이 싸가지고 온 카레밥과 된장국을 결들인 점심식사는 소박하지만 풍성해보였다.
산을 내려오는 도중 박 시장은 이날 최대의 민원인을 만났다.
전날 열린 박 시장과의 뉴타운 재개발·재건축 이해당사자 면담에 늦어 미처 요구사항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는 K씨. 그는 지난 3일 재개발 철회를 요구하며 시청 로비 점거농성을 주도했던 인물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뉴스를 보고 이날 산행에 동참했다는 그는 "박 시장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고 말했다.
산행초입부터 막무가내로 기자들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기사화해달라고 요구하다가 핀잔만 들은 그는 기어이 박 시장과 나란히 서는데 성공했다.
두 사람은 10여분 동안 둘만의 대화를 나눴다. 대화를 마친 K씨는 흡족한 표정이었다.
박 시장은 "민원이 참 많다"며 "이런 것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시장의 역할인 것 같다"고 말했다.
3시30여분에 걸친 '민원산행'은 이날 오후 1시30분께 그렇게 마무리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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