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오현종의 무협소설 '옛날 옛적에 자객의 칼날은'

"내게는 양지를 택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나는 재상에게 악을 말하고, 그는 장단 맞춰 악을 행한다. 내가 어둠에 가까이 가는 만큼 그도 몇 걸음 더 가까이 간다. 운명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다. 내 운명이란 환관의 운명이 거세당하는 순간 결정되어지는 것처럼, 미궁 안으로 들어오던 날 미리 결정지어진 것이다."(68~69쪽)
사마천의 '사기'에 수록된 '자객열전' 속 인물 '섭정'에 매료된 소설가 오현종이 여섯번째 장편소설 '옛날 옛적에 자객의 칼날'을 내놨다. 다채로운 상상력으로 장르 간의 경계를 해체해온 오현종이 이번에 눈을 돌린 장르는 무협 서사다.
이야기는 액자 밖에서부터 시작된다. 복수를 꿈꾸며 온갖 책들에 파묻혀 복수에 관한 문장을 모으는 사내가 있다. 그에게, 역시 복수만이 삶의 전부인 여인 '정(貞)'이 다가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 액자 안에서 확장되는 그 흥미로운 이야기에는 피 묻은 칼로써 나라를 제 손에 틀어쥔 극악무도한 재상이 등장한다. 온 사방이 그의 적인지라, 재상은 방이 마흔 칸이나 되는 구불구불한 미궁을 만들어 그 안에서 매일 밤 침소를 바꾸며 생활한다.
어느 밤 솜씨가 뛰어난 한 자객이 재상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자객은 제가 죽은 뒤 남은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얼굴 가죽을 벗겨서 씹어 삼키고는 숨을 거둔다. 이 사건을 구심점으로 하여, 재상을 증오하지만 미궁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철저히 그의 손발이 되어 악을 행해야 했던 재상의 의붓아들, 의붓아들에게 물려받은 복수심을 품고 살아가는 자객의 아이들 '명(冥)'과 '정(貞)', 그리고 미궁 안에서 이 모든 것을 기록하는 재상의 벙어리 첩 등이 번갈아가며 등장해 관련된 진술을 겹쳐나간다.
소설 속 인물들은 더 깊은 악(惡)을 향해 가라 앉아가는 듯하다. 작품 속에서 악은 읽는 것만으로 몸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게 표현된다. 악의 근원, 악을 없앨 수단으로서의 악에 대한 오현종의 사유가 드러난다.
소설 속에서 악인과 선인은 점점 얼굴의 왼편과 오른편처럼 닮아간다. 자신의 불행을 남에게 퍼뜨려 고독감을 견디고 싶었던 재상과 그 의붓아들의 감춰진 연약함, 그리고 그들과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자들이 숨기고 있던 잔혹함이 뒤로 갈수록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진실에 근접해간다.
그는 작가의 말에서 "그럴 수 있다면 이 책이 내가 아는 모든 이야기 속 인물들이 한때 존재했었다는 증거가 되었으면 좋겠다"며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죽고 나면 다 사라져버릴 부질없는 삶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고 밝혔다.
이어 "누구든 자신만의 이야기, 들려줄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면 의미 없는 삶이었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을까 싶다"며 "나는 그 믿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176쪽, 1만1000원,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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