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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들의 잘못"…43년 전 고문 피해자에 판사 사죄

등록 2025.05.21 20:56:19수정 2025.05.21 22: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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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법 권혁중 부장판사, 김동현씨에게 직접 사과

1982년 안기부 불법 구금돼 고문 당해…재심서 무죄

"피고인 호소를 단 한 번도 귀 기울여 주지 못했다"

"불법적 계엄이 헌법에 위반돼 무효라고 선언 못해"

[서울=뉴시스] 정병혁 기자 =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현판 모습. 2025.05.21. jhope@newsis.com

[서울=뉴시스] 정병혁 기자 =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현판 모습. 2025.05.21.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김정현 기자 = 전두환 군부독재 정권 시기 정보기관에 불법 구금돼 구타와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한 60대 남성에게 재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하면서 선배들의 과오를 반성한다고 사과해 눈길을 모은다.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형사4-2부(부장판사 권혁중·황진구·지영난)는 국가보안법·옛 반공법 위반 혐의로 1983년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형이 확정됐던 김동현씨에 대한 재심에서 42년만인 이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장인 권 부장판사는 재심 전 공소사실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한 취지를 밝힌 후 주문을 낭독하기 전 "판결문에 기재되지 않는 이야기들을 하겠다"고 운을 뗐다.

그는 "저로서는 40여년이 지난 피고인에 관한 수사기록, 공판기록, 누렇게 변한 기록들을 보고 여러 생각에 잠겼다"며 "더구나 피고인이 미농지(황색 닥나무 종이)에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레 적어 나간 항소이유서와 상고이유서를 보며 그 안에 담긴 피고인의 절규와 호소, 좌절과 희망, 이 모든 것들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고 밝혔다.

권 부장판사는 "피고인은 아마 안기부 끌려가 오랫동안 구속되고 고문당하면서도 이런 허위 자백은 인권 수호의 최후 보루인 법원에 가서 충분히 인정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1심 첫 공판기일부터 (피고인이) 허위자백과 불법구금 고문당했음을 줄기차게 호소했음에도 1심 법원은 물론 2심, 나아가 대법원까지도 어느 심급에서도 단한 번 피고인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어 "결국 피고인은 5년형 실형 살고 출소했고 국내에서 국보법 위반자라는 죄명만으로도 감시와 통제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판단에 조국을 떠나 이국에서 긴 생활을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 부장판사는 "호소를 단 한 번도 귀 기울여주지 못한 점, 피고인이 거의 자백을 고문·불법구금에 의해 할 수밖에 없었음을 과감히 인정하지 못했던 용기 없음, 80년대에 내려진 불법적 계엄이 헌법에 위반돼 무효라고 과감히 선언하지 못했던 소신 없음, 선배 법관들의 그런 잘못에 대해 대신 사과의 말씀 드린다"고 말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김씨는 헤드폰을 끼고 권 부장판사의 말을 들었고, 이 대목에서 눈물을 닦아냈다.

[서울=뉴시스] 정병혁 기자 = 서울고법이 위치한 서울 서초구 서울법원종합청사 본관 모습. 2025.05.21. jhope@newsis.com

[서울=뉴시스] 정병혁 기자 = 서울고법이 위치한 서울 서초구 서울법원종합청사 본관 모습. 2025.05.21. [email protected]

권 부장판사는 "앞으로 이런 불법 계엄, 그로 인해 피고인과 같이 억울한 옥살이로 인해 청춘을 정말 어렵게 억울하게 지낸 일들이 다신 없도록 법관들로서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면서 우리들의 업무에 충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자 김씨는 고개를 숙이고 소리 없이 흐느꼈다.

권 부장판사는 발언을 마치고 "원심을 파기한다. 피고인은 무죄"라고 주문을 낭독했다. 방청석에서 지켜보던 사람들도 조용히 흐느꼈다.

지난 1980년 5월께 20대 대학생이었던 김씨는 자작 시집을 발표한 후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으로 검거될 것을 우려해 망명을 결심했다. 그는 약 2년 뒤인 1982년 4월 스웨덴으로 출국해 국제사면위원회 스웨덴지부에 망명을 신청했다. 그는 북한 대사관까지 방문하기도 했다.

그해 5월 한국대사관 측 설득으로 귀국한 그를 김포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옛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현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이었다. 이들은 김씨를 영장 없이 임의동행 방식으로 끌고 가 40일 간 불법으로 감금했다.

김씨는 이후 영장 발부로 구속 기소돼 같은 해 12월 11일 옛 서울형사지방법원(서울중앙지법 전신)에서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을 선고 받았다. 이듬해 4월 서울고법 항소심에서는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으로 감형됐고, 대법원은 7월 상고를 기각해 2심 판결을 확정했다.

김씨는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구타와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했다. 40여년 뒤 재심 재판부 뿐만 아니라 지난 2023년 진실규명을 결정한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판단이다.

재심 재판부도 이날 김씨에게 적용됐던 옛 반공법 등 위반 혐의에 대해 "피고인이 안기부 조사를 받는 동안 구타,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하고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심리적으로 위축돼 허위자백을 강요 당했다"며 당시 진술조서의 증거 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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