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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문화의 원류] 탐라, 국왕 흔적이 사라진 고대 국가

등록 2026.06.21 06:4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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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 지배층 유물, 700~800년 공백

문헌에는 엄연히 국(國)·국왕으로 기록

남해안 일대 해상 무역에 참여

탐라 왕궁과 무덤, 찾아야 할 과제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제주시 아라동에 위치한 고조기(1088-1157) 묘를 지난 16일 방문했다. 제주출신으로 고려의 재상에 오른 인물이다. 2026.06.21. ijy788@newsis.com.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제주시 아라동에 위치한 고조기(1088-1157) 묘를 지난 16일 방문했다. 제주출신으로 고려의 재상에 오른 인물이다. 2026.06.21. [email protected].


제주는 오랫동안 '변방의 섬'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제주문화의 깊은 층위를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오래전부터 한반도와 동아시아 해역을 잇던 해상교류의 거점이었으며 제주 사람들은 화산섬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돌과 바람, 불과 흙을 다루며 고유한 생활문화를 일궈왔다.
문헌과 유적, 생활문화와 구술, 자연환경과 생업의 흔적을 따라가며 제주가 지닌 독창성과 개방성을 살펴보고 문화콘텐츠로 확장될 가능성을 함께 조명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지난 16일 오후 제주시 아라동 언덕에 자리한 고조기(1088-1157) 묘를 찾았다. 제주출신으로 고려의 재상에 오른 인물이다. 그의 묘는 제주에서 피장자가 확인된 무덤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봉분 둘레에는 돌기둥이 세워져 있고, 상석과 향로석, 묘비, 문인석과 무인석 등이 배치됐다. 가운데는 원형의 문양이 새겨진 반원형 판석을 뒀다. 고려시대 성행한 방묘 형태로 묘역내 비와 석물은 대부분 근래에 세운 것이다.

제주 고씨 시조로 여겨지는 '고을나'와 함께 '양을나', '부을나' 등 3성(姓)이 출현한 삼성혈은 북쪽방향 직선거리로 2㎞가량 떨어져 있다.

고조기 묘는 현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탐라 출신 수장층의 가장 선명한 무덤인데 이전의 수장층 무덤을 찾아서 거슬러 올라가면 단절의 기간이 너무나 길다. 3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는 제주시 용담동 철기부장묘를 제외하면, 탐라 최고 지배층의 무덤은 고고학적으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용담동 철기부장묘에서는 철제 장검, 철모, 철촉, 철부, 유리구슬 등이 출토돼 대외교류 권한을 장악한 상위층의 무덤으로 해석됐다. 하지만 그 이후 탐라의 왕, 국주, 성주, 최고 수장층이 어디에 묻혔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김경주 제주문화유산연구원 원장은 "제주시 곽지유적 5지구 등을 조사하면 철기부장 묘 이후 5세기 수장층 묘를 확인할 가능성이 있는데 아직은 진척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제주 토양 특성상 50년 정도 지나면 인골, 목재 등 유기물이 대부분 남지 않아서 무덤 발굴과 해석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결국 700~800년의 공백이 있는 것이다. 이 공백은 탐라 고대사의 가장 큰 물음으로 남아 있다. 왕은 있었는가, 더 정확히 말하면 "왕은 있었는데, 그의 왕궁과 무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제주시 용담동 철기부장묘 유물. 2026.06.21. ijy788@newsis.com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제주시 용담동 철기부장묘 유물. 2026.06.21. [email protected]


왕궁은 사라졌지만 문헌에서 탐라는 '국'

고고학의 침묵과 달리 문헌은 여러 자료에서 탐라를 분명히 '국(國)'으로 기록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2년(476년) 기록에는 '탐라국'이 토산물을 바치자 백제 왕이 기뻐하며 사자에게 은솔의 벼슬을 주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은솔은 백제 16관등 가운데 상위 관등이다. 이는 탐라가 단순한 해상 취락이 아니라 외교 사절을 파견하고 조공품을 준비할 수 있는 정치체였음을 보여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문무왕 2년(662년)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이 와서 항복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국주라는 표현은 탐라 내부에 최고 지배자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좌평은 백제식 관등 체계와의 관련성을 보여준다. 탐라가 백제와 오랜 관계를 맺고 있었고 백제 멸망 이후 신라와 새로운 관계를 설정했다는 뜻이다.

고려사에서는 '탐라국' 기록이 자주 등장하고 중국 기록도 탐라를 독립된 정치체로 인식했다. 중국 당회요 기록을 보면 '탐라 왕의 성은 유리이고, 이름은 도라인데…'는 내용이 있다. 탐라를 왕이 있는 나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서기에도 탐라의 외교 활동은 반복된다. 661년 탐라 왕자 아파기 등이 일본에 파견되는 등 일본과의 교류가 나타난다.

왕자, 국왕, 국주, 성주라는 명칭이 여러 문헌에 걸쳐 확인되는 만큼 탐라를 단순한 부족사회나 해상 취락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용담동 제사유적, 탐라의 권력을 시사

아직까지 탐라의 왕릉이 발굴되지 않았지만 수장층 실체를 짐작하게 하는 다른 고고학 유물이 있다. 제주시 용담1동 일대에서 확인된 용담동 제사유적이다.

이 유적은 통일신라 후반에서 나말여초, 대략 8~9세기 무렵으로 편년된다. 제사용으로 해석되는 유물들이 집중적으로 출토됐다. 회색도기 병과 항아리, 금동제 허리띠 장식, 철제 도끼와 화살촉, 유리구슬, 동제 숟가락, 방추차 등이 확인됐다.
장경병과 장경호 같은 병류, 말이 음각된 장경호 파편은 이 공간이 단순한 생활 유적이 아니라 의례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고대 사회에서 제사는 정치였다. 하늘, 산, 바다, 조상신과 소통하는 권한은 곧 지배 권력의 핵심이었다. 신정일치 사회에서 최고 권력자는 제사를 주관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용담동 제사유적은 탐라의 최고 지배층이 제사의례를 통해 사회를 통합하고, 교역과 항해를 의례적으로 관리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제주시 용담동 제사유적 유물.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전시중이다. 2026.06.21. ijy788@newsis.com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제주시 용담동 제사유적 유물.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전시중이다. 2026.06.21. [email protected]


종달유적, 탐라의 해상무역 증명

탐라의 교역은 종달리 유적이 잘 보여준다. 종달리 지역은 철기시대부터 탐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물이 장기간 축적된 복합유적이다. 조개껍데기와 동물 뼈, 생활 도구만 나온 것이 아니다. 토기, 철기, 도자기, 유리, 옥 등 다양한 유물이 함께 확인된다. 외부 문물이 들어오고 토산품이 나가는 교역의 접점이었다.

이 유적에서 철기문화와 초기 교류의 흔적이 나타나고, 이후에 외래 문물이 본격 유입된다. 번영기에는 유물량이 늘고 해양교류의 중심지로서 위상이 강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종찬 제주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종달리 유적은 단순히 조개껍데기 터인 패총이 아니라 제사의례를 비롯해 다양한 활동이 이뤄져 당시 생활상을 구체화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로 해석할 수 있다"며 "종달리는 바다로 나가고, 배가 머물고, 물자를 모으기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췄다"고 분석했다.

탐라의 교역망은 한반도 남해안과 일본열도, 중국 해역을 잇는 구조 속에서 작동했다. 제주에서 출토되는 마한계 토기와 가야계 토기, 반대로 남해안 늑도·군곡리 등의 유적에서 확인되는 제주산 토기편은 양방향 교류를 말해준다. 탐라가 단순히 외래 문물을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교역품을 가지고 바다로 나갔다는 뜻이다.

탐라가 외부에 내보낸 물품으로는 사슴, 노루, 멧돼지 등 육상 자원을 비롯해 전복, 토기 등이 거론된다. 이는 탐라가 바다와 산의 산물을 함께 공급하는 섬나라였음을 가리킨다.

또한 탐라는 외부에서 철기, 직물, 도끼, 자귀, 손칼 같은 공구류를 비롯해 중국계 위세품, 화폐, 청동거울, 도자기 등을 들여왔다. 탐라는 철 생산 기반이 약했다. 수장층은 사슴과 전복과 같은 자원의 교류를 바탕으로 철과 위세품을 확보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 전기로 내려오면 탐라의 공물은 더 구체적으로 기록된다. 팔관회와 연등회에는 탐라 사신이 참여했고, 말·선박·귤·우황·쇠가죽·나육(소라'고둥류의 살)·해조·진주·비자 등이 진상 물품으로 거론된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말과 선박이다. 말은 탐라가 목장과 방목 체계를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선박은 배를 만들고 운용하는 기술, 즉 해양국가의 물적 기반을 의미한다.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마을 모습을 지난 13일 상공에서 촬영했다. 이 마을 일대에 철기시대부터 탐라시대에 이르기까지 해상무역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유물이 분포하고 있다. 2026.06.21. ijy788@newsis.com

[제주=뉴시스] 임재영 기자 =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마을 모습을 지난 13일 상공에서 촬영했다. 이 마을 일대에 철기시대부터 탐라시대에 이르기까지 해상무역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유물이 분포하고 있다. 2026.06.21. [email protected]


교역과 섬을 지킨 활과 칼

탐라는 교역만 하던 섬이 아니었다. 바다 위의 교역로를 유지하려면 항해술뿐 아니라 방어력과 군사력도 필요했다. 당회요는 탐라에 활과 칼, 방패와 창이 있었다고 전한다. 또한 다섯 부락, 8000호의 체제를 갖춘 섬나라로 묘사한다. 이는 탐라가 일정한 인구와 부락 조직, 무장 체계를 갖춘 정치체였음을 시사한다.

고고학 자료도 이 기록과 맞물린다. 종달리 유적에서는 철제 화살촉과 무기류가 확인된다. 특히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유행한 장신화된 철촉 계열은 한반도 남부와의 교류뿐 아니라 탐라 내부의 무장 체계도 함께 생각하게 한다. 활촉은 사냥 도구일 수도 있지만, 해상 거점과 교역 물자를 지키는 방어 장비였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시대 이익태 제주목사의 지영록, 이원조 제주목사의 탐라록 등에서 제주의 군사가 용맹하고 날쌔다고 표현되는 대목이 있다. 조선의 기록을 곧바로 고대 탐라의 군사력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 다만 바다와 바람, 포구와 항로 속에서 살아온 제주 사회의 기민한 신체성과 방어 전통이 오랜 시간 축적됐을 것으로 여겨진다.

700년 이상 존재한 탐라, 왕의 흔적을 찾는 과제가 남아

문헌상 탐라국은 1105년 고려 숙종 10년 탐라군 설치와 함께 공식적으로 해체된다. 이후 1153년 탐라현으로 개편되고 13세기 이후에는 제주라는 이름이 본격화된다. 행정구역으로 편입됐다고 해서 탐라의 정치적·문화적 기억이 곧바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탐라의 완전한 통합은 더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1404년 조선 태종 때 성주와 왕자라는 칭호가 좌도지관, 우도지관으로 바뀌었다. 이후 탐라의 오래된 지배 명칭은 제도적으로 사라졌다.

김동전 제주대 교수는 지난해 한국학연구에 게재한 '탐라국사의 전개와 이해 방향 모색' 논문에서 "탐라국은 고려 470여년, 조선 500여년보다 더 오랜 (적어도) 700여년을 독립국가로 존재해 한국사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사 관점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탐라국이 독립국으로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바다로 둘러싸인 해상왕국이었다는 사실과 주변 세력과의 공존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탐라의 왕릉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왕릉이 없다고 국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문헌은 탐라를 '국'이라 불렀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으며 고고학은 제사와 군사, 교역의 흔적을 보여준다. 탐라는 바다를 건너 물자를 주고받고, 제사를 통해 권위를 세우며, 활과 칼로 항로를 지킨 섬나라였다. 사라진 왕의 무덤과 궁성, 그리고 아직 땅속에 묻혀 있을 탐라의 정치 공간을 찾아내는 일은 과제로 남아 있다.

*이 기사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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