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 이름갈았다, 아들 많이 낳고싶어서…"

안대회(49) 성균관대 한국한문학 교수는 최근 ‘문헌과 해석’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산’으로 알려진 정조의 이름은 1796년 8월11일 ‘규장전운(奎章全韻)’이라는 한자의 소리 사전 발간을 계기로 기존의 ‘산(示+示)’의 독음에서 ‘성(셩)’으로 바뀌었고, 사후에도 이 독음으로 읽힌 것 같다고 밝혔다.
안 교수는 “정조가 1792년 3월 이덕무에게 편찬을 명령한 규장전운이 거의 완성돼 인쇄에 들어갈 때 수록된 ‘성(氵+省)’이라는 글자를 빼버리고 그 자리에다 자기 이름인 ‘산(示+示)’이라는 글자를 집어넣었다”며 “‘산(示+示)’이라는 글자는 이후 발음이 ‘성(셩)’으로 바뀌게 됐다”고 설명했다.
근거는 19세기 저명한 중인 문사인 옥산(玉山) 장지완(1806~?)의 ‘비연외초(斐然外抄)’다. 정조의 이름이 본래 ‘산(算)’으로 읽혔지만, 고증을 거친 규장전운 발간을 계기로 ‘성’으로 바로잡았다고 쓰여 있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또 국왕이 즉위하면 임금의 어명과 똑같은 글자는 사용하지 못하고 인명과 지명·관직명을 고쳤다는 것을 언급하며 ‘산(示+示)’이 ‘산(算)’의 옛 글자임을 들어 산학(算學)을 주학(籌學), 산원(算員)을 계사(計士)로 바꾸고, 평안도와 충청도 고을인 이산(理山)과 이산(尼山)을 각각 초산(楚山)과 이성(尼城)으로 바꿨다는 것 등도 제시했다.
당초 규장전운에 ‘산(示+示)’ 대신 집어넣을 ‘성(氵+省)’이라는 글자는 서약봉(1558~1631)의 이름이다. 서성은 조선후기 대표적인 경화세족인 대구 서씨의 중흥조로 후손이 번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안 교수는 “이는 아들을 많이 낳고자 하는 바람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며 “당시 자식이 귀한 정조가 자손이 번성한 서성의 이름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보는 것이 유일한 동기”라고 판단했다.
정조는 당시 결혼한 지 오래됐지만 왕비 청풍 김씨에게서 자식을 보지 못했고, 의빈 성씨 소생인 문효세자는 요절했다. 아들은 늦게 수빈 박씨에게서 순조(1790~1834)만을 두었다. 건강이 좋지 못한 정조는 손자 익종과 증손자 헌종에서 대가 끊어졌다.
<사진> 장지완 필사 초본 ‘비연외초’
[email protected]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