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치명가①]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일가

【서울=뉴시스】박주연 기자 = 구한 말의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사진=민주당 이종걸 의원 제공) [email protected]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 알려진 우당(友堂) 이회영 일가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전 재산과 지위, 생명까지 포기하며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현했다.
이회영은 고종시절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넷째아들로, 세칭 삼한갑족(三韓甲族, 신라·고려·조선 3조에 걸쳐 대대로 문벌이 높은 집안)으로 불리는 경주 이씨 백사공파의 일원이다.
백사공파는 '오성과 한음'의 오성인 백사 이항복 이래 8대에 걸쳐 연이어 10명의 재상(9명의 영의정과 1명의 좌의정) 배출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다.
이항복은 선조시절이던 1580년 알성문과에 급제했고 36살이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따라 의주(현재의 함남 덕원)로 갔다. 이후 병조판서가 돼 명나라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고 근위병을 모집하는데 주력했다.
1592년 이조판서를 지낸 후 1598년 좌의정으로 진주사가 돼 명나라를 다녀왔고, 1599년 영의정이 됐다. 광해군 시절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 삭탈관직됐다. 이후 북청(北靑)에 유배돼 1618년 6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이항복의 11세손이기도 한 이회영은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타국으로 망명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독립투사를 양성했다는 점에서 소름끼칠 정도로 이항복과 닮은 삶을 살았다. 이항복은 북청에 유배돼, 이회영은 여순감옥에서 삶을 마쳤다는 점까지도 비슷하다.
이회영은 구한 말 일제에 나라가 넘어가자 독립운동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결성했고, 이후 44살의 나이에 형제와 가족들을 설득, 만주로 집단 망명했다.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형인 건영, 석영, 철영 동생인 시영, 호영 가족이 모두 망명에 참여했고, 독립운동도 함께 했다. 이들이 막대한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독립운동자금은 당시 돈으로 40만원(현재가치 600억원 이상)이었다.
이회영 일가는 중국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로 이동, 이동녕, 이상룡 등 집단 망명가들과 함께 1911년 민단(民團) 성격의 자치기관인 경학사와 신흥강습소(후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를 설립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전략, 전술, 총검술, 격검 등을 교육하며 1919년 11월 안도현 삼림지역으로 이동할 때까지 3500명의 독립운동가들을 길러냈고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등 무장독립투쟁을 치러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함께 청산리대첩에 참여했고, 그 결과 1920년10월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일본군 1만2000여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냈다.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은 졸업 후에도 결사단체인 신흥학우단에 가입, 청년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이회영의 조카 이규준과 아들 이규학도 신흥학우단을 중심으로 행동조직 '다물단'을 조직, 일본 밀정을 암살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이회영은 이후 베이징을 중심으로 무정부주의사상에 입각한 독립운동노선을 추구했다. 그는 '독립한국은 만인이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고, 공평하게 행복을 누리며,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지배없는 세상, 억압과 수탈이 없는 세상이 우리 독립한국에 실현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회영 일가는 독립운동을 위해 재산과 지위, 생명까지 모두 희생해야 했다.
이회영은 김규식 신채호 안창호 김창숙 조소앙 등 독립운동가들에게 숙소와 식사를 제공하는 등 끊임없이 독립운동 자금을 댔고 결국에는 상인들의 빚 독촉과 가난에 시달렸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의 저서 '이회영과 젊은 그들'에 따르면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나와 누님은 2년 반을 중국 상인들에게 욕도 먹고 심지어는 구타도 당한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이회영과 함께 활동했던 정협섭은 자서전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에서 "우당 이회영 집을 찾아갔더니 여전히 생활이 어려워 식구들의 참상은 말이 아니었다"며 "끼니도 굶은 채 누워있었다"고 전했다.
이회영의 여섯 형제 중 다섯은 독립운동을 하다 고문사하거나 아사했다. 이회영은 1932년 11월 66세의 나이로 중국 여순감옥에서 고문사했다.
둘째 아들인 석영은 1934년 상하이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났고, 셋째 철영은 1925년에, 여섯째 호영은 1933년에, 첫째 건영은 1940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시영만 홀로 살아남아 귀국,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이 됐다.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과 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정치인 가문의 맥을 잇고 있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은 1936년 이회영의 아들 이규학 선생과 흥선대원군의 외손녀 조계진 사이에서 태어났다. 1956년 육군사관학교 16기로 임관했고 1980년 중앙정보부 기획조정실장,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을 지낵 민주정의당 창당에 참여했다.
11,12,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민정당 원내총무와 사무총장을 거쳤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을 거쳐 국가정보원장을 역임했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사촌동생인 이종걸 의원은 이회영의 막내아들 이규동 선생의 장남이다. 경기고, 서울대를 거쳐 30회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선된 후 18대까지 내리 3선을 했다. 열린우리당 원내수석부대표, 새천년민주당 대표 비서실장, 원내부총무 등을 지냈다.
많은 역사가들은 망국과 동시에 만주지역에서 조직적이 독립운동이 있었던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이회영 일가 등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회영과 젊은 그들'을 저술한 이덕일 소장은 자신의 저서에서 "삼한갑족 출신이 전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에 바치고 굶은 채 누워있는 정경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다"며 "이회영은 자신의 지위와 재산은 물론 생명까지 모두 신념을 위해 바쳤다"고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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