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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속도의 시대에 제동을 걸다…'회신 지연'

등록 2025.12.17 11: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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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회신 지연' (사진=민음사 제공) 2025.12.17.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회신 지연' (사진=민음사 제공) 2025.12.17.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조기용 기자 = "지금 답장할 수 없다는 말은/쉬이 용서받기 어려운데//그러나/도저히 열어 볼 수 없었다고/그게/내가 살아 있다는 뜻이라고" ('회신 지연' 중)

지난달 제44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나하늘의 첫 시집 '회신 지연'(민음사)가 출간됐다. 시집은 사회에 빠르게 응답하지 않고 되레 지금의 삶을 가장 천천히 세심하게 포착하도록 한다.

시집은 제목처럼 독자의 독해를 '지연'시킨다. 활자 앞에 잠시 멈춰 서게 하고, 고민의 늪에 빠져 쉽게 넘어가지 못하도록 붙잡는다. 모든 것이 속히 지나가고, 호흡이 빠른 시대에 저자는 오히려 정지와 유예를 외친다.

저자 역시 사회에서 모습을 감추고 한 발 물러나기를 택한다. 연작시 '사라지기'는 그의 '소멸'의 의도가 엿보인다. 온전한 '나'로 거듭나기 위해 사회와 거리를 둔다. 공백을 고의로 확장하고, 그 틈을 나로 채운다. 타인에게 자신을 노출하며 욕망을 충족시키는 과시의 문화 대신, 내면의 성숙을 향한 다른 방향을 제안한다.

"현대인이 통신네트워크에 접속함으로써 존재를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면, 전자기기가 연장된 신체로서 나를 살고 있다면, 전자기기가 연장된 신체로서 나를 살고 있다면. 반대로 나를 끄고, 비활성화함으로써 나를 얼마간 축소하고 죽이는 것 역시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사라졌었다." ('사라지기 1' 중)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양경언은 퀴어 이론 연주가 잭 핼버스탬의 책 '실패의 기술과 퀴어 예술' 속 표현을 인용한다. 그는 "'하기'만을 독려하는 세상에서 무언가가 되지 않고, 무언가를 만들지 않으려는 '하지 않기' 그러므로 '대항의 혁명적 언명'으로 적극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여지를 남긴다. 이와 같이 무언가를 하지 않는 '급진적 수동성'은 나하늘의 시가 자주 꾀하는 전략 중 하나다"고 말한다.

사회의 쓸모 있는 존재가 되도록 효율성과 생산성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사회에 반(反)한다. 아울러 저자는 유도적인 지연을 통해 우리의 깊숙한 내면까지 작품의 의미를 전달한다. '글자를 본다'는 행위를 넘어 사유하고 머뭇거리며 시를 함께 완성하도록 만든다.

"하얀 그저께 민지 친구 는 공책 을 던지고 배구공 에게 넘겼다 오늘 을" ('문제 4')

단어가 흩어져 배치된 이 시는 독자가 이를 나열하고 자신만의 문장을, 시를 만들도록 유도한다. 이 외 다른 작품에서는 시 곳곳에 빈칸을 뚫어 넣어 문장 앞에서 자연스레 장고(長考)에 빠진다. 온전한 독해가 이뤄질 수 없게 기존의 문법을 의도적으로 파괴한다. 모두에게 각자 삶이 흘러가는 시간이 다르듯이 독해의 속도도 온전히 독자가 규정할 수 있도록 한다.

저자는 독립문예지 '베개'의 창간멤버로, 2017년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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