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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신상공개 '낡은 잣대'로는 범죄수법 진화 못 따라간다

등록 2026.03.09 13:3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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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신상공개 '낡은 잣대'로는 범죄수법 진화 못 따라간다



[서울=뉴시스]신유림 기자 = 피의자 신상공개를 둘러싼 해묵은 논쟁이 반복되고 있다. 강력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피의자 신상공개를 놓고 '알 권리'와 '인권 보호'가 충돌하면서 사건별로 공개 여부가 달라지고 있어서다. '고무줄 잣대' 논란이 재연되면서 신상공개 기준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최근 일어난 '강북 모텔 연쇄살인' 사건은 신상공개 논쟁에 다시 불을 지폈다. 경찰은 피의자 20대 여성 김모씨의 신상을 비공개하기로 했다. 범행 수법이 신상 공개 요건인 '잔혹성'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잔혹성의 잣대가 물리적 폭력에만 머물러 있다면, 이는 진화하는 범죄 수법을 따라가지 못하는 시대착오적 처사다.

김씨의 범행은 대중이 기억하던 전형적인 '포식자형' 사이코패스 범죄와는 결이 달랐다. 대표적인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인 유영철이나 강호순처럼 노골적인 물리력을 앞세우는 대신, 약물로 피해자를 무력화하고 '친밀함'이라는 가면으로 경계심을 무너뜨렸다.

이른바 '여성형 사이코패스' 범죄의 전형이다. 보험금을 노리고 주변 인물들에게 수면·정신계열 약물을 먹여 사고로 위장한 '엄 여인 사건'의 엄인숙, 복어 독을 이용해 피해자를 살해하려 한 '계곡 살인 사건'의 이은해 역시 직접적인 폭력 대신 약물과 심리적 지배를 범행 도구로 삼았다.

범죄의 양상은 진화하며 교묘해지고 있지만, 이를 읽어내는 신상 공개 기준은 여전히 물리적 폭력의 정도에만 매몰되어 있다.

문제는 기준의 방향만 낡은 것이 아니라, 기준 자체도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는 점이다. 현행 제도는 범행의 잔혹성, 중대한 피해, 범인임을 입증할 증거, 국민의 알 권리와 범죄 예방 등 공익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이 잔혹한 범죄인지, 공익은 어디까지 인정되는지에 대한 세부 기준은 모호하다. 결국 비슷한 사건에서도 판단은 수사기관의 해석과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유족의 반발과 여론의 비판이 이어지자 검찰이 뒤늦게 김씨에 대한 신상 공개 여부 재검토에 나선 것도 불신을 키운다. 법적 기준에 따라 일관되게 움직여야 할 판단이 여론의 압력에 따라 뒤흔들리는 모습처럼 비칠 수밖에 없다.

그 사이에서 여론은 늘 공권력보다 먼저 움직인다. 이은해 사건에서도 공식적인 신상 공개 이전부터 온라인에서는 이름과 얼굴, 과거 방송 출연 이력까지 빠르게 퍼졌다.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이번 사건의 피의자 김씨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 역시 언론 보도 이후 빠르게 확산됐다. 사건이 알려지기 전 약 240명 수준이던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는 보도 이후 1만명을 넘기며 40배 이상 증가했고, 결국 계정은 비공개로 전환됐다.

스마트폰 하나로 온 세상이 연결된 사회에서 공권력에 대한 불신은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진다. 대중은 수사기관의 결정을 기다리기보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에서 '디지털 단죄'를 시작한다. 피의자의 사진과 사생활 정보는 순식간에 퍼지고, 범죄의 구조와 제도의 허점보다 외모 품평과 자극적 비난이 먼저 소비된다.

그 화살은 어디로 향하는가.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확대 재생산되면서 피의자의 가족과 지인, 심지어 무관한 제3자까지 공격 대상이 된다. 그리고 숱한 소음과 혼란 속에서 가장 큰 상처를 떠안는 이들은 결국 피해자의 유족이다. 정의를 앞세운 분노가 또 다른 가해를 낳는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신상 공개를 어떤 기준으로, 누가 통제할 것인가. 범죄가 교묘해지고 다양해질수록 신상 공개 기준 역시 더 구체적이고 정교해져야 한다. 국가가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는 사이, 그 공백은 결국 여론과 인터넷이 메우게 된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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