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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형 트레일러닝②]전설·기록을 달리기 서사로 만든 아테네

등록 2026.08.05 08:00:00

달리는 사람'에서 전령 조형물까지 곳곳에 마라톤 이야기

승전보 전설은 올림픽 종목으로, 역사기록은 스파르타슬론 대회로

제주 자연·역사·마을을 잇는 '달려야 할 이유’가 경쟁력

[아테네=뉴시스] 임재영 기자 = 아테네 도심에 설치된 조각 작품 ‘드로메아스(Dromeas·달리는 사람)’. 철골과 겹겹의 유리판으로 달리는 순간의 속도와 움직임을 형상화한 것으로 지난 3일(현지시간) 현장에서 생동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26.08.05. ijy788@newsis.com

[아테네=뉴시스] 임재영 기자 = 아테네 도심에 설치된 조각 작품 ‘드로메아스(Dromeas·달리는 사람)’. 철골과 겹겹의 유리판으로 달리는 순간의 속도와 움직임을 형상화한 것으로 지난 3일(현지시간) 현장에서 생동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26.08.05. [email protected]


트레일러닝은 산과 숲, 능선과 들판, 해안 등 주로 비포장 길을 걷고 달리는 스포츠다. 단순한 기록 경쟁을 넘어 고도 변화와 거친 노면을 극복하는 도전, 자연 속에서 얻는 경험, 안전과 환경에 대한 책임을 함께 요구한다. 세계 각국은 트레일러닝을 지역의 경관과 역사, 공동체를 연결하는 체류형 스포츠관광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세계 유명 대회 현장취재와 인터뷰, 전문가 진단을 통해 제주형 트레일러닝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편집자주>

[아테네=뉴시스] 임재영 기자 = 한낮의 아테네 도심을 거대한 사람이 달리고 있었다. 철골로 만든 몸 위에 수천 장의 유리판을 겹쳐 붙였다. 날카롭게 뻗은 유리 조각은 햇빛을 반사했고, 몸의 뒤쪽으로 흩어지는 잔상은 빠르게 질주하는 사람의 움직임을 표현했다. 차량이 쉴 새 없이 오가는 대로변에서도 거인은 앞으로 돌진하는 듯했다.

그리스 조각가 코스타스 바로초스의 작품 '드로메아스(Dromeas·달리는 사람)'다. 높이 12m의 조각으로 철과 유리를 사용해 달리는 순간의 속도와 에너지를 형상화했다. 현재 아테네 도심의 대표적인 공공미술로 자리 잡았다.

지난달 3일 드로메아스 앞에 서자 아테네가 단순히 고대 유적의 도시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다가왔다. 이 도시에서 달리기는 운동 종목에 머물지 않는다. 신화와 역사, 전쟁과 승리,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정신을 아우르는 문화적 상징이다.

이 조각상은 특정 인물을 묘사한 것이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고대 '마라톤 전령 페이디피데스'를 떠올리게 했다. 전쟁의 위급한 소식을 품고 도시와 도시 사이를 달렸던 고대 전령의 이미지를 현대 도시 한복판에서 다시 만나는 느낌이었다.

마라톤 전투를 기록한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는 페이디피데스로 표기되는 전령이 등장한다. 아테네 장군들은 페르시아군과 싸우기 전 스파르타에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그를 파견했다. 헤로도토스는 그가 아테네를 출발한 다음 날 스파르타에 도착했다고 기록했다.

올림픽 마라톤종목 탄생과 관련해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페이디피데스가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달려 승리를 알리고 숨졌다"는 것인데 헤로도토스의 기록에는 없다.

승전 소식을 전한 주자의 이야기는 수백 년 뒤의 문헌에서 나타난다. 플루타르코스는 '에우클레스(또는 테르시포스)'가 갑옷을 입은 채 전장에서 달려와 "우리가 승리했다"고 말한 뒤 곧바로 숨졌다는 내용을 전했다.

페이디피데스를 찾아간 곳에서 만난 에우클레스

[아테네=뉴시스] 임재영 기자 = 그리스 라피나 교차로의 마라톤대로변에 설치된 세 명의 주자상을 지난달 3일 현지에서 확인했다. 아테네 정통 마라톤 코스가 지나는 이곳에 에우클레스 전령상이 있었으나 2016년 도난당했고, 대신 지금의 조형물이 들어섰다. 2026.08.05. ijy788@newsis.com

[아테네=뉴시스] 임재영 기자 = 그리스 라피나 교차로의 마라톤대로변에 설치된 세 명의 주자상을 지난달 3일 현지에서 확인했다. 아테네 정통 마라톤 코스가 지나는 이곳에 에우클레스 전령상이 있었으나 2016년 도난당했고, 대신 지금의 조형물이 들어섰다. 2026.08.05. [email protected]

도심의 드로메아스를 확인한 뒤 실제 전령 조형물을 찾아 나섰다.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에서 정통 마라톤코스를 거슬러 라피나항구 방향으로 25㎞가량을 이동하자 라피나 교차로의 도로변에 세 명의 주자가 나타났다.

청록색과 검은색, 황동색으로 표현한 주자들이 앞을 향해 달리는 조형물이었다. 세 사람의 몸은 서로 겹치면서 하나의 달리기 동작을 완성했다. 일부 자료에서 소개한 페이디피데스 동상으로 알고 찾아갔지만 현장에서 확인한 사연은 달랐다.

이곳에는 마라톤 전투의 승전보를 아테네에 전한 것으로 후대에 전해지는 에우클레스의 동상이 있었다.

그리스 주요 일간지 카티메리니의 영문판에 따르면 조각가 코스마스 촐라코스가 1997년 황동으로 에우클레스 전령상을 만들었다. 무게가 약 500㎏에 달했던 동상은 마라톤 코스의 도로변을 약 20년간 지켰으나 2016년 1월 도난당했다.

현재 이 자리에는 옛 동상을 그대로 복원한 작품 대신 세 명의 주자가 달리는 새로운 조형물이 서 있다. 옛 동상의 기단과 명판은 그대로 남아 '우리가 이겼다. 마라톤을 달린 중장보병 에우클레스, 기원전 490년' 문구가 새겨져 있다.
[아테네=뉴시스] 그리스 라피나 마라톤대로변에 있다가 도난당한 에우클레스 전령상. 일부 자료에는 마라톤 전령 ‘페이디피데스’로 소개됐다. (사진=에카티메리니 영문판에서 캡처) photo@newsis.com

[아테네=뉴시스] 그리스 라피나 마라톤대로변에 있다가 도난당한 에우클레스 전령상. 일부 자료에는 마라톤 전령 ‘페이디피데스’로 소개됐다. (사진=에카티메리니 영문판에서 캡처) [email protected]


전설에서 탄생한 올림픽 종목

현대 마라톤의 이름과 서사는 기원전 490년 아테네군과 페르시아군이 맞붙은 마라톤 전투에서 출발한다.
아테네 정통 마라톤은 마라톤시에서 출발해 마라톤 전투 전사자 묘역을 돌아 나온다. 이후 라피나 교차로 등을 거쳐 아테네 도심으로 들어간다. 마지막에는 파나티나이코 경기장 트랙을 달려 결승선에 도착한다.

현장에서 바라본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은 거대한 흰 대리석 그릇처럼 보였다. 길게 뻗은 트랙 양쪽으로 관중석이 가파르게 솟았다. 텅 빈 경기장에서도 수많은 관중이 결승선을 향해 들어오는 주자를 기다리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 경기장은 1896년 제1회 근대올림픽의 주경기장이었다. 최초의 올림픽 마라톤은 마라톤에서 경기장까지 약 40㎞를 달리는 방식으로 열렸다. 그리스의 스피리돈 루이스가 가장 먼저 경기장에 들어와 우승했고, 그의 결승 장면은 근대올림픽을 대표하는 역사적 순간으로 남았다.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은 지금도 아테네 정통 마라톤의 결승점으로 쓰인다. 선수는 마라톤 전투의 현장에서 출발해 근대올림픽의 상징적인 경기장으로 들어온다. 출발지와 코스, 결승점이 약 2500년의 역사를 하나의 스토리로 연결한다.

마라톤은 1896년 근대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새롭게 만들었다. 프랑스의 언어학자이자 고대 그리스 연구자 미셸 브레알은 마라톤 전투의 승리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한 전령이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 달렸다는 이야기에 주목했다.

그는 피에르 드 쿠베르탱에게 이 전설을 바탕으로 장거리 달리기 종목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첫 올림픽 마라톤은 마라톤과 아테네를 연결했고, 개최국 그리스 선수가 우승하면서 세계적인 스포츠 서사가 완성됐다.

현대 마라톤은 마라톤 전투라는 역사적 사건, 후대에 형성된 승전보 전설, 근대올림픽의 스포츠 기획이 결합해 탄생했다. 사실과 전승이 겹치며 세계인이 공유하는 하나의 이야기가 됐다.

[아테네=뉴시스] 임재영 기자 = 지난달 3일(현지시간) 아테네 파나티나이코 경기장 전경. 1896년 제1회 근대올림픽의 주경기장이자 최초의 올림픽 마라톤 결승점으로, 현재도 아테네 정통 마라톤의 결승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2026.08.05. ijy788@newsis.com

[아테네=뉴시스] 임재영 기자 = 지난달 3일(현지시간) 아테네 파나티나이코 경기장 전경. 1896년 제1회 근대올림픽의 주경기장이자 최초의 올림픽 마라톤 결승점으로, 현재도 아테네 정통 마라톤의 결승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2026.08.05. [email protected]

마라톤의 역사적 원형은 트레일러닝에 가까웠다

오늘날 마라톤은 포장도로 42.195㎞를 달리는 종목이다. 하지만 사료로 확인되는 페이디피데스의 여정은 마라톤에서 아테네까지가 아니라 아테네에서 스파르타까지였다.

고대에는 현재와 같은 포장도로가 없었다. 전령은 흙길과 돌길, 산과 고개, 농경지와 계곡을 통과해야 했다. 현대 스포츠로 해석하면 포장길을 달리는 로드마라톤보다 트레일러닝에 가까운 여정이다.

페이디피데스의 실제 기록에 가까운 여정을 현대에 되살린 울트라마라톤 대회가 '스파르타슬론'이다.

영국 공군 장교 존 포든은 헤로도토스의 기록을 읽다가 페이디피데스가 '다음 날' 스파르타에 도착했다고 기록한 대목에 주목했다. 그는 현대인이 아테네에서 스파르타까지 약 250㎞를 36시간 안에 달릴 수 있는지 의문을 품었다.

포든과 동료들은 1982년 직접 코스를 달려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를 계기로 1983년 11개국 45명의 선수가 참가한 첫 국제 스파르타슬론이 열렸고, 1984년 국제스파르타슬론협회가 창립됐다.

현재 대회는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기슭에서 출발해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왕 동상 앞에서 끝난다. 결승선은 일반적인 아치나 테이프가 아니다. 선수가 레오니다스왕 동상의 발을 만지는 순간 레이스가 끝난다. 많은 완주자는 존경과 감격을 표현하기 위해 동상의 발에 입을 맞춘다.

파나요티스 보넬리스 스파르타슬론 기술 디렉터는 서면 인터뷰에서 "아크로폴리스에서의 출발, 그리스를 가로지르는 여정, 자원봉사자와 지역 공동체의 지원, 그리고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 동상 앞에서 맞이하는 감동적인 결승은 페이디피데스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며 "스파르타슬론이 주목받는 이유는 스포츠, 역사, 문화, 인간의 지구력을 매우 진정성 있는 방식으로 결합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아테네=뉴시스] 2024년 스파르타슬론 참가자들이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선수들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기슭에서 스파르타까지 달린 뒤 동상의 발을 만지는 것으로 레이스를 마친다. (사진=국제스파르타슬론협회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아테네=뉴시스] 2024년 스파르타슬론 참가자들이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선수들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기슭에서 스파르타까지 달린 뒤 동상의 발을 만지는 것으로 레이스를 마친다. (사진=국제스파르타슬론협회 제공)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제주에도 '달려야 할 이유'가 필요하다

아테네에서 확인한 가장 큰 경쟁력은 자연경관이나 거리만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대회의 출발과 코스, 결승점을 하나로 묶는 역사적 서사가 그 중심에 있었다.

아테네 도심의 '달리는 사람', 라피나의 전령 조형물, 파나티나이코 경기장과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왕 동상은 대회가 열리지 않는 날에도 달리기의 기억을 전한다. 아테네는 전설을 마라톤으로 만들었고, 스파르타슬론은 고대의 기록을 250㎞의 레이스로 되살렸다. 세계적인 대회의 힘은 참가자가 그 길을 달리는 이유에서 나온다.

제주에는 탐라의 옛길과 말테우리의 이동로, 해녀와 포구, 화전마을과 목장, 마을의 설화와 생활문화가 풍부하다. 출발과 결승에 상징성을 더하고, 코스가 지나는 마을의 역사와 주민의 삶을 연결할 때 자연·문화경관은 대회 고유의 서사로 확장되고, 트레일러닝은 일회성 행사를 넘어 지역문화로 뿌리내릴 수 있다.

*이 기사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취재지원을 받았습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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