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푸투라서울은 ‘빛의 공간’…에스 데블린이 비춘 인간, 그리고 예술
등록 2026.08.14 15:12:50수정 2026.08.14 16:34:54
푸투라 서울 세번째 기획전…에스 데블린 한국 첫 개인전
비욘세, U2, 아델, 켄드릭 라마 콘서트·무대 설계로 유명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푸투라 서울 에스 데블린 개인전. '인피니트 라이브러리(Infinite Library)'영상 작품.2026.08.14.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내 모든 모습은 결국 타자를 비추는 모습입니다.”
1만여 권의 책으로 둘러싸인 어두운 도서관 벽에 문장이 떠오른다.
책 사이로 빛이 번지고 이미지가 흐른다. 새들이 날아오르고 작가의 목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책을 읽는 공간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책이 관객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영상이 끝날 즈음 갑자기 책장 한쪽이 문처럼 열린다. 그런데 열린 책장의 양쪽 면이 거울이다.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푸투라 서울 에스 데블린 개인전. 인피니트 라이브러리 설치 작품이 마술처럼 열리면 미러 메이즈(Mirror Maze)〉로 들어간다.
*재판매 및 DB 금지
조금 전까지 나란히 앉아 책장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거울 속에 한꺼번에 나타난다. 책을 보고 있던 관객이 순식간에 작품 속 이미지가 되는 순간이다.
열린 책장을 통과하면 거울로 이루어진 미로가 이어진다. 어디까지가 실제 공간이고 어디부터가 반사인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빛과 거울이 공간을 무한히 증식시킨다.
거울 속에서 나를 찾으려 하지만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수없이 겹쳐진 타인들이다. 남을 바라보는 사이 그 틈에서 다시 나를 발견한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푸투라서울은 14일 서울 종로구 푸투라서울에서 영국 출신 시각예술가 에스 데블린(Es Devlin) 개인전 '세 번째 시: 에스 데블린, 다시 집으로' 기자간담회를 갖고 작품 '미러 메이즈'를 선보이고 있다. 2026.08.14. pak7130@newsis.com](https://img1.newsis.com/2026/08/14/NISI20260814_0021399321_web.jpg?rnd=20260814133931)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푸투라서울은 14일 서울 종로구 푸투라서울에서 영국 출신 시각예술가 에스 데블린(Es Devlin) 개인전 '세 번째 시: 에스 데블린, 다시 집으로' 기자간담회를 갖고 작품 '미러 메이즈'를 선보이고 있다. 2026.08.14. [email protected]

[사진=박현주 미술전문기자' 에스 데블린 미러 메이즈 *재판매 및 DB 금지
나를 보려던 거울에서 타인을 만난다
거울은 원래 자신을 확인하는 물건이다. 우리는 거울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나’를 기다린다. 그런데 데블린은 그 익숙한 기대를 배반한다. 나를 만나기 위해 들여다본 곳에 다른 사람이 들어온다.
14일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말했다.
“우리는 거울에 다가갈 때 자신의 모습을 볼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거울을 바라봤을 때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보게 되는 것이 이 공간의 놀라움입니다.”
그래서 이곳의 미로는 단순한 시각적 착시가 아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잃어버리는 동안 내가 누구인지도 잠깐 흔들린다.
거울 속에서 나는 하나가 아니다. 옆 사람의 몸과 겹치고 반대편 사람의 얼굴과 섞인다. 끝없이 복제된 공간 속에서 수많은 ‘나 아닌 것’과 함께 존재한다.
데블린의 거울은 공간을 무한히 확장하면서 동시에 ‘나’라고 믿어온 경계를 느슨하게 만든다. 나와 타인, 인간과 다른 생명, 실제와 반사, 자연과 인공, 작품과 관객 사이의 경계. ‘나’라고 믿어온 경계를 잠시 열어보는 경험이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영국 출신 시각예술가 에스 데블린(Es Devlin)이 14일 서울 종로구 푸투라서울에서 개인전 '세 번째 시: 에스 데블린, 다시 집으로' 기자간담회에 앞서 작품 '미러 메이즈'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2026.08.14. pak7130@newsis.com](https://img1.newsis.com/2026/08/14/NISI20260814_0021399309_web.jpg?rnd=20260814134137)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영국 출신 시각예술가 에스 데블린(Es Devlin)이 14일 서울 종로구 푸투라서울에서 개인전 '세 번째 시: 에스 데블린, 다시 집으로' 기자간담회에 앞서 작품 '미러 메이즈'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2026.08.14. [email protected]
스펙터클이 아니라 ‘친밀함’을 설계하다
수만 명의 관객, 거대한 스크린과 빛, 음악. 그의 이력만 보면 ‘스펙터클’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이번 전시를 걷고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정반대의 단어가 남는다. 스펙터클을 만드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은 ‘친밀함’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10만 명이 모여도 노래를 듣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이다. 거대한 무대의 빛이 아무리 화려해도 그것을 바라보고 기억하는 것은 한 사람의 눈과 몸이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극장에서 시작됐다고 말했다. 스무 살 무렵 텅 빈 흰 공간과 여러 사람이 뒤섞여 함께 무언가를 만드는 어수선한 붉은 공간 가운데 후자를 선택했다. 이후 공연장에서 한 곡의 노래가 10만 명의 마음을 움직이고, 작은 극장에서는 하나의 문장이 200명의 생각을 바꾸는 순간을 경험했다.
그 경험은 지금도 그의 작업을 움직인다. 예술은 완성된 물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과 생각에 변화를 일으키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미술관에서도 질문은 같다. 관객이 무엇을 보고 듣고 경험하며, 그 경험이 한 사람의 몸과 생각에 무엇을 남기는가다.
‘미러 메이즈(Mirror Maze)’ 역시 관객이 잠시 어린아이처럼 공간을 탐색하도록 만든다. 미로에는 하나의 정해진 길만 있는 것도 아니다. 숨겨진 통로를 발견하면 붉은빛의 백스테이지 같은 공간으로 이어진다.
그곳에는 데블린이 2006년 처음 미러 메이즈를 구상한 이후 20년간 자신과 스튜디오 팀, 제작자들이 남긴 드로잉이 펼쳐진다. 이번 전시의 구조물 역시 한국 제작자들과 협업해 서울에서 만들었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영국 출신 시각예술가 에스 데블린(Es Devlin)이 14일 서울 종로구 푸투라서울에서 개인전 '세 번째 시: 에스 데블린, 다시 집으로' 기자간담회에 앞서 작품 '다시 집으로'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2026.08.14. pak7130@newsis.com](https://img1.newsis.com/2026/08/14/NISI20260814_0021399314_web.jpg?rnd=20260814134137)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영국 출신 시각예술가 에스 데블린(Es Devlin)이 14일 서울 종로구 푸투라서울에서 개인전 '세 번째 시: 에스 데블린, 다시 집으로' 기자간담회에 앞서 작품 '다시 집으로'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2026.08.14. [email protected]
거울 밖으로 확장된 타자
타원형 구조 안에 새와 나비, 곤충과 식물이 뒤엉킨 ‘컴 홈 어게인(Come Home Again)’에는 데블린이 4개월에 걸쳐 직접 그린 250종의 생명이 등장한다. 생명들의 소리와 8개 언어로 부르는 합창이 함께 흐르며 런던과 서울에서 마주한 생명들을 하나의 풍경으로 엮는다.
데블린은 서울에 약 6000종의 생물이 살아가며 “그 가운데 인간은 단 한 종일 뿐”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다시 거울이 등장한다. 작품의 타원은 어린 시절 읽었던 ‘백설공주’ 속 거울이자 인간의 얼굴이며, 여권 사진에서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얼굴을 맞춰 넣는 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거울 안을 채우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새와 나비, 곤충과 식물이다. ‘나’를 타인에게 열었던 거울이 이번에는 인간이라는 종 자체를 다른 생명에게 열어놓는다.
AI 시대, 몸으로 경험한다는 것
“AI가 이미지와 언어를 점점 더 능숙하게 만들어내는 시대에 예술에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본질적인 행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데블린은 ‘몸’을 이야기했다.
그는 AI를 부정하지 않았다. 영국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 작업에서는 AI를 활용해 더 많은 사람을 재현할 수 있었다며, AI는 규모와 도달 범위를 확장하는 유용한 도구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과 사람이 실제로 마주하는 ‘embodied encounter’, 즉 몸으로 하는 만남을 대체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에게 작품의 최종 결과물 역시 종이나 물질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데블린의 작업을 관통한다.
이번 전시의 관객 참여형 작품 ‘콜렉티브 포트레이트(Collective Portrait)’에서 관람객은 대형 테이블에 마주 앉아 처음 만난 사람의 초상을 그린다. 그림이 쌓일수록 작품도 전시 기간 동안 계속 변화한다.
“나는 그림의 질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서로 만난 흔적을 남기기를 바랍니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푸투라서울은 14일 서울 종로구 푸투라서울에서 영국 출신 시각예술가 에스 데블린(Es Devlin) 개인전 '세 번째 시: 에스 데블린, 다시 집으로' 기자간담회를 갖고 작품 '라인 오브 라이트'를 선보이고 있다. 2026.08.14. pak7130@newsis.com](https://img1.newsis.com/2026/08/14/NISI20260814_0021399318_web.jpg?rnd=20260814133931)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푸투라서울은 14일 서울 종로구 푸투라서울에서 영국 출신 시각예술가 에스 데블린(Es Devlin) 개인전 '세 번째 시: 에스 데블린, 다시 집으로' 기자간담회를 갖고 작품 '라인 오브 라이트'를 선보이고 있다. 2026.08.14. [email protected]
푸투라서울은 ‘빛의 공간’
2층 ‘스크린쉐어(Screenshare)’에서는 지난 30여 년간 축적된 스케치북이 대형 스크린을 이룬다. 드로잉과 메모, 협업의 과정이 영상으로 펼쳐지고, 영상이 끝나면 관객은 스크린을 구성하던 스케치 한 장을 가져갈 수 있다. 전시장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콜렉티브 포트레이트’와 반대로, 이곳에서는 작가의 흔적을 관객이 가져간다. 주고받는 관계다.
푸투라서울은 개관 이후 ‘빛’을 하나의 언어처럼 이어가고 있다. 2024년 개관전에서 레픽 아나돌이 데이터와 기계가 만들어낸 이미지로 공간을 채웠고, 안소니 맥콜은 빛과 관객의 신체가 만나는 경험을 보여줬다.
세 번째인 데블린은 그 빛을 전시장 밖 자연으로까지 확장한다. 앞선 두 전시가 암전된 공간을 중심으로 했다면 이번에는 자연광 자체가 작품의 일부가 된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영국 출신 시각예술가 에스 데블린(Es Devlin)과 구다회 푸투라서울 대표가 14일 서울 종로구 푸투라서울에서 개인전 '세 번째 시: 에스 데블린, 다시 집으로' 기자간담회에 앞서 의견을 나누고 있다. 2026.08.14. pak7130@newsis.com](https://img1.newsis.com/2026/08/14/NISI20260814_0021399303_web.jpg?rnd=20260814134137)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영국 출신 시각예술가 에스 데블린(Es Devlin)과 구다회 푸투라서울 대표가 14일 서울 종로구 푸투라서울에서 개인전 '세 번째 시: 에스 데블린, 다시 집으로' 기자간담회에 앞서 의견을 나누고 있다. 2026.08.14. [email protected]
구다회 푸투라서울 대표는 “2024년 6월 런던의 데블린 스튜디오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그가 세계적인 무대 디자이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며 “한 사람의 목소리와 한 생명의 존재를 오래 바라보는 예술가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미술관이 무엇을 보여줘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왔는데 데블린이 그 질문에 대한 답처럼 다가왔다”며 “관객을 단순히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남겨두지 않고 빛과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몸을 느끼고 타인을 바라보며 인간 아닌 생명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현존’의 경험에서 이번 전시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푸투라서울은 14일 서울 종로구 푸투라서울에서 영국 출신 시각예술가 에스 데블린(Es Devlin) 개인전 '세 번째 시: 에스 데블린, 다시 집으로' 기자간담회를 갖고 작품 '스크린쉐어'를 선보이고 있다. 2026.08.14. pak7130@newsis.com](https://img1.newsis.com/2026/08/14/NISI20260814_0021399319_web.jpg?rnd=20260814133931)
[서울=뉴시스] 박진희 기자 = 푸투라서울은 14일 서울 종로구 푸투라서울에서 영국 출신 시각예술가 에스 데블린(Es Devlin) 개인전 '세 번째 시: 에스 데블린, 다시 집으로' 기자간담회를 갖고 작품 '스크린쉐어'를 선보이고 있다. 2026.08.14. [email protected]
전시 개막에 맞춰 데블린의 신간 'A Concise Atlas of Es Devlin'도 국내에 처음 선보인다. 2023년 뉴욕 쿠퍼 휴잇 스미소니언 디자인 뮤지엄 회고전을 계기로 출간된 'An Atlas of Es Devlin'의 컴팩트 에디션으로, 942쪽에 약 1000점의 이미지와 최근 프로젝트 28점을 담았다. 글로벌 공식 출간일인 10월11일에 앞서 한국에서 선공개됐다.
전시는 2027년 1월17일까지 열린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Copyright © NEWSIS.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