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립 잡기노트]세종대왕의 모자? 2년이 빈다…

얼마 전 ‘세종대왕 모자’가 발견됐다.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이상규 교수 등이 선보인 익선관(翼蟬冠)은 안쪽에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制字解) 일부가 들어있다. 이 교수는 세종대왕이 1444년 이전에 착용한 사조룡의(四爪龍衣)에 맞춘 사조익선관으로 추정한다. 세종 26년(1444)까지 임금의 옷이 사조룡의였다가 명나라에서 오조룡복(五爪龍服)을 하사받아 오조룡의로 바뀌었는데, 세종실록과 익선관 속 훈민정음 제자해로 봐서 세종이 아니면 쓸 수 없는 모자라는 것이다.
문제는, 2년이라는 기간이 빈다는 점이다. 익선관 안의 제자해는 1446년 9월 완성된 훈민정음 해례본 내 제자해 3쪽 뒷면과 동일한 판본 활자체의 문서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정인지 후서와 조선왕조실록 모두 해례본은 1446년 9월에 완성됐다고 증언한다. 글자체, 글자 사이의 간격, 좌우 글자들과의 관계 등을 대조하면 둘은 서로 같은 판본임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대왕은 명의 황제에게서 익선관을 포함한 발톱 5개의 오조룡복을 하사받아 1444년 3월26일 이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착용했다.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의 일부 문서가 들어있다는 것은 이 익선관이 1446년 이후에 만들어졌다는 증거다. 1444년부터 1450년 사망하기까지 세종은 오조룡복 차림이었다. 사조룡이 새겨진 이 익선관은 세종대왕의 물건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다.
그렇다면, 누구의 익선관인가. 세종 31년(1449) 기사에는 ‘임금이 또 말하기를, 예전에 사조룡의를 입었었는데 뒤에 듣자니 중국에서는 친왕이 오조룡을 입는다기에 나도 입고 천사(天使)를 대접했다. 그런데 그 후 황제가 오조룡복을 하사했다. 지금 세자로 하여금 사조룡을 입게 하면 내게도 혐의로울 것이 없고 중국의 법제에도 잘못됨이 없겠다’고 명기돼 있다.
결국 1446년 9월 훈민정음 해례본 완성 이후 세종조 때 사조룡복과 사조룡익선관을 착용한 이는 세종이 아니라 세자(문종)라는 말이다. 문종은 훈민정음 창제에 깊이 관여했다. 세자 신분으로 사조룡 익선관 안에 부왕의 뜻을 기리는 의미로 해례본 판본 활자체가 찍힌 문서를 넣었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왕은 물론 왕세자의 복식에도 왕을 상징하는 용과 왕(王)자가 새겨져 있었다.
세조 2년(1456) 3월21일 기록도 살펴봄직 하다. 김하는 ‘신이 세종조에 있을 때 여러 번 북경으로 가 대명집례(大明集禮)를 상고했습니다. 황제의 곤룡포 위 왼쪽 어깨에는 해가 있고 오른쪽 어깨에는 달이 있으며 황태자부터 친왕(親王)·군왕(郡王)은 곤룡포 위에 모두 오조룡을 썼습니다. 세자는 명을 받지 못했으니 우선 사조룡을 써서 겸양의 뜻을 두소서’라고 아뢰었다.
의경세자 얘기다. 세조의 아들 역시 이번 익선관의 주인일 가능성이 있다. 그는 기록에서와 같이 사조룡을 썼고, 할아버지인 세종 임금을 기념해 해례본 일부를 사조룡 안에 넣었을 지도 모른다.
과학적으로 연대를 측정해 이 익선관이 최근에 위조된 것이 아님이 밝혀진다면, 사조룡 복장의 ‘세종 때의 세자’(후일의 문종)’ 또는 그 뒤 ‘문종의 세자’(후일의 단종), ‘세조 때의 의경세자’의 것이라고 봐야 타당하다. 더 나아가 연산군이 언문 자료를 불사른 사실에 주목해 연산군 이전까지를 기준 삼는다면, 이 익선관은 ‘예종의 세자’ 또는 ‘성종의 세자’의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대종언어연구소 박대종 소장은 “이번에 공개된 익선관은 세종대왕의 것이 아니다”면서 “이 익선관이 세종대왕의 것이면 좋겠지만 사실이 왜곡돼서는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1444년부터 1450년까지 세종은 오조룡 복색을 착용했기 때문에 1446년 완성된 훈민정음 해례본 제자해 일부 문건이 들어있는 이번 사조룡 익선관을 세종대왕의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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