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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안먼 사태 25주기]①정작 중국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탱크맨…잊혀지는 톈안먼 사태

등록 2014.06.02 15:32:55수정 2016.12.28 12: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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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AP/뉴시스】 AP통신 사진기자 제프 와이드너가 찍은 사진으로, 지난 1989년 6월5일 중국 베이징(北京) 중심가 창안제(長安街)에서 한 남성이 맨몸으로 4대의 탱크를 막아섰다. 탱크맨이라는 별명이 생긴 이 남성은 '톈안먼 사태', 총칼을 향한 외로운 저항의 상징으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중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014.06.02

【베이징=AP/뉴시스】 AP통신 사진기자 제프 와이드너가 찍은 사진으로, 지난 1989년 6월5일 중국 베이징(北京) 중심가 창안제(長安街)에서 한 남성이 맨몸으로 4대의 탱크를 막아섰다. 탱크맨이라는 별명이 생긴 이 남성은 '톈안먼 사태', 총칼을 향한 외로운 저항의 상징으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중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014.06.02

【서울=뉴시스】문예성 기자 = 올해 톈안먼 사태 25주년을 맞아 중국 당국이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며 전례없이 크게 긴장하고 있다. 이례적으로 통제가 심한 기념일을 앞두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잊혀지는 이 사건에 대해 재조명해 본다.

 유혈 진압에 나선 탱크 행렬을 맨몸으로 가로막아 '톈안먼(天安門) 사태'에서 총칼을 향한 외로운 저항의 상징으로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이른바 '탱크맨'으로 불리는 남성은 정작 중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89년 6월5일 중국 베이징(北京) 중심가 창안제에서 한 남성이 맨몸으로 4대의 탱크를 막아선 모습을 포착한 AP통신 사진은 톈안먼 사태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아 있다.

 흰색 욋옷에 검은 색 바지 차림의 남성은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묵묵히 탱크 앞에 서 있었고, 이후 두 명의 남성이 나타나 그를 끌고 사려져 버렸다.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25년이 지난 지금도 탱크맨의 정체는 베일에 싸여 있다. 영국 언론이 그의 이름을 왕웨이린(Wang Weilin)이라고 보도한 뒤 중국권 매체가 ‘王維林’이라고 표기하지만 실제 이름과 신분, 거처 등은 지금도 확인된 바 없다.

 탱크맨에 대한 정보 부족은 톈안먼 사태에 대한 정보 부족 문제를 대변해 준다.

 톈안먼 사태는 지난 1989년 4월15일 진보적 성향의 지도자였던 후야오방(胡耀邦)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죽음이 동기가 됐다. 그의 죽음은 민주화를 열망했던 학생들을 자극했다. 4월17일 베이징(北京)대에 후 전 총서기 추모 대자보가 붙은 이후 학생들의 추모 움직임은 상하이(上海) 등 전국 주요 도시들로 확산됐다.

 사태는 4월26일 이후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한다. 바로 그날 당 기관지 런민르바오(人民日報)가 '동란에 반대한다'는 사설을 통해 학생들의 추모 열기를 동란으로 규정했다.

 이에 자극받은 학생들의 시위 규모는 더 커졌고 정치적 색도 분명해졌고 시위대 규모도 수십만 명으로 늘었다.

 당시 중국 공산당 총서기였던 자오쯔양(趙紫陽)이 5월4일 학생 대표를 만나면서 사태가 잠시 진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결국 5월20일 계엄령을 선포했고, 그 뒤 시위대 광장 점거 상태가 이어지자 6월4일 0시 마침내 중국 인민해방군이 톈안먼 광장에 진입하며 사태는 진압됐다.

 당국이 톈안먼 폭동 기간 민간인 희생자는 700여 명이라고 밝히지만 이 사태에서 희생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실종자 가족은 수십 년 동안 진실 해명을 요구해왔고,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평생 끔찍한 기억을 안고 살고 있다.

 톈안먼 운동 참가자이자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인 팡정(方正)은 그들은 총격, 진압, 유혈 등 강압적인 방식으로 항의하는 민의에 대처했고, 시진핑(習近平) 현 정권은 개혁의 길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면서 25년 전에 비해 현 정권의 부패는 더 심해졌고, 관리의 특권은 더 커졌다고 역설했다.

 1989년 당시 팡정은 베이징대에 다니는 대학생이자 육상 선수이기도 했다. 그러나 군 당국이 톈안먼 광장에서 강제 진압을 하면서 그는 탱크에 두 다리를 깔려 평생 장애를 얻었다.

 당국의 통제로 중국의 사이버 공간에서 톈안먼 사태에 대한 거론 자체가 금기시됐고,  '중국판 위키백과'인 바이두 (百度) 백과에서 1989년의 정보는 통째로 사라졌다. 이에 따라 이 사건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들의 접근은 원천 봉쇄됐고, 경험해본 중국인들조차 톈안먼 사태는 기억 속에서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독일의 소리'는 개방적이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활용하는 중국 20대 초반의 젊은 세대들은 외국에 나온 뒤 처음으로 1989년 발생한 톈안먼 사건에 대한 진실을 접하게 되면 일부는 충격을 받고, 일부는 강한 불신으 표시한다고 전했다.

 이런 부류에 속하는 한 중국인 유학생은 이 언론에 "서방 기자들은 왜 거짓말만 하세요? 당신들이 이런 거짓말을 꾸며낸 이유는 당신들이 중국이 강대해지는 것을 봐줄 수 없기 때문 아닌가요"라고 반문했다.

 탱크맨 사진을 찍었던 제프 와이드너는 아직도 가끔 탱크맨이 생각난다면서 그의 상황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다고 전했다. 아울러 "그는 마치 전쟁의 무명영웅처럼 우리가 자유와 민주주의 및 존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고 전했다.

 중국 인권운동가 후자(胡佳)는 "그는 그 시대 청년의 상징으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학생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대만에서 20여 년 간 망명 생활을 해 온 우얼카이시(吾爾開希)는 '포스트 톈안먼 사태' 시대에서 당국은 금전과 경찰로 탱크를 대체했고, 반대 세력을 맹아(萌芽) 상태에서 없앴다고 주장했다.

 우얼카이시는 중국 공산당은 톈안먼 사태 당시 강경 진압보다 더 정교한 수단으로 국민을 통제하고 있다면서 즉 경제적 자유로 민중의 협력을 이끌어냈고, 군인보다는 소프트한 경찰력으로 국민의 항의에 대처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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