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공원·동망봉·종묘…서울서도 할 수 있는 '단종앓이'

서울 동작구 ‘사육신 역사공원’ 내 ‘의절사’. (사진=한국관광공사)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김정환 관광전문 기자 = 유해진·박지훈이 열연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감독 장항준)가 1300만 관객을 모으며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덕분에 조선 제6대 단종(1441~1457)이 유배를 가서 살았던 ‘청령포’(淸泠浦),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관풍헌’(觀風軒), 그의 시신을 영월 호장 엄흥도 가족이 몰래 수습해 묻은 것으로 알려진 ‘장릉’(莊陵)등이 있는 강원 영월군에는 ‘단종앓이’를 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영월에 직접 가기 어렵거나, 이미 다녀와 단종과 관련한 다른 곳을 둘러보고 싶다면 서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단종 애사’(端宗 哀史)는 서울(조선 시대 한양과 사대문 밖 경기도)에서 시작해 수백 년이 흐른 뒤 다시 서울에서 마무리됐기 때문이다.
◇사육신 역사공원
단종은 1455년 6월(음력) 숙부 수양대군(1417~1468·조선 제7대 세조)에게 양위하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났다.
이에 집현전 학사 출신 문신들과 일부 무신이 이듬해 6월 그를 복위시키기 위해 거사를 계획했다.
그러나 뜻을 함께했던 김질이 밀고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체포된 주모자들은 대부분 극심한 고문을 받은 뒤, 사지를 각각 묶은 우마차를 동시에 출발시켜 몸을 찢는 ‘거열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아무도 기개를 꺾지 않았다. 그들이 바로 ‘사육신’(死六臣)이다.
이뿐만 아니다. 그들의 삼족(친가·외가·처가)의 남성들은 모조리 참수됐다. 그 수가 수백 명에 달했다. 여성들은 하루아침에 관비 신분으로 전락한 뒤 세조의 측근 공신들에게 하사됐다.
이런 상황에서 사육신은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르기 어려웠다.
그러나 후대에 들어 이들의 충절이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제19대 숙종(1661~1720) 때 이들이 신원되면서 지금의 서울 동작구 노량진에 ‘사육신묘’가 조성됐다.
현재 ‘사육신 역사공원’에는 성삼문·박팽년(옥사)·이개·하위지·유성원(자결)·유응부 등과 1970년대 추가된 김문기까지 7인의 묘역이 자리한다.
‘역신’(逆臣)의 오명을 쓰고 죽었지만, ‘충신’(忠臣)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 잠든 곳이다.

【서울=뉴시스】서울 청계천 ‘영도교’에서 열린 단종과 정순왕후의 이별 장면 재현 행사. (사진=뉴시스 DB)
◇청계천 영도교
사육신의 복위 거사가 ‘실패한 뒤 불안 속에서 지내야 했던 단종의 삶에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1457년 6월 그는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됐고, 머나먼 영월 유배가 결정됐다.
며칠 뒤 서울이 기억하는 비극적인 이별이 펼쳐졌다.
단종이 멀리 떠나던 날, 정순왕후 송씨(1440~1521)는 청계천 왕심평대교(旺尋坪大橋)까지 나왔다.
믿고 의지했던 숙부에게 배신을 당해 왕위를 빼앗기고 앞날마저 불투명해진 17세 소년과 18세 소녀 부부는 그곳에서 생이별을 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정확한 날짜와 장면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백성들 사이에서 그 돌다리는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던 장소로 기억돼 왔다.
그래서 ‘영영 건너지 못한 다리’라는 의미의 ‘영도교’(永渡橋)로 고쳐 불렸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사라졌던 다리는 2005년 청계천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다시 놓였다. 종로구 숭인동과 중구 황학동을 잇는다.

서울 종로구 ‘청룡사’ 내 ‘우화루’. (사진=한국관광공사) *재판매 및 DB 금지
◇정업원
홀로 남겨진 정순왕후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연이어 닥쳤다.
단종이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면서 대비(의덕왕대비)에서 군부인으로 격하됐다.
그가 역모 혐의로 죽임을 당한 뒤에는 관비 신분으로 전락했다.
전라도 전주의 친정은 판돈녕부사를 지낸 부친 송현수가 사육신 거사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처형되는 등 이미 풍비박산 난 상태였다.
관비 신분이었지만 세조의 ‘배려’로 노역은 면제됐다. 그러나 그것이 감사할 일이었을까. 정순왕후는 식량 지원조차 거절했다.
정순왕후는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밖에 있던 ‘정업원’(淨業院)에 머물렀다.
권좌에서 밀려난 왕비, 세자빈, 공주 등이 비구니가 되거나 은거하며 여생을 보낸 절이었다.
고려 제31대 공민왕(1330~1374)의 후비인 혜비나 1398년 8월 벌어진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이방원(조선 제3대 태종)에게 패해 17세에 죽임을 당한 세자 이방석(1382~1398)의 누나 경순공주, 부인도 그곳에서 살다 한 많은 생을 마쳤다.
정순왕후는 자지초에서 얻은 자주색으로 옷감을 물들인 뒤 댕기, 저고리깃, 고름, 끝동 등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궁핍한 처지에 놓인 그를 안타까워한 마을 여성들이 몰래 음식을 나눠줬다고 전해진다.
정업원의 흔적은 종로구 숭인동 ‘청룡사’(靑龍寺)에 남아 있다.
이 절에는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떠나기 전날 정순왕후와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낸 것으로 알려진 ‘우화루’(雨花樓)도 있다.

【서울=뉴시스】서울 종로구 숭인공원에서 거행한 ‘단종비(妃) 정순왕후 추모문화제’. (사진=뉴시스 DB)
◇동망봉
종로구 창신동과 숭인동 사이 낙산에 작은 봉우리가 있었다. ‘동망봉’, 즉 ‘동쪽을 바라보는 봉우리’다.
정순왕후는 60년 넘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그곳에 올라 영월 방향을 바라보며 님을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시간은 길었다. 단종이 1457년 9월 영월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 것과 달리, 그는 제11대 중종(1488~1544) 재위 시기인 1521년 4월에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순왕후가 참고 견디는 사이 세조 이후 왕실은 끊임없이 흔들렸다.
세조는 1468년 8월, 중년 이후 악화된 종기로 고통받다가 숨졌다.
장남 의경세자가 1457년 8월 19세에 요절했기 때문에 차남 해양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제8대 예종(1450~1469)이다.
그러나 그는 1년 남짓 지난 1469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그 짧은 치세에서 가장 널리 기억되는 사건은 부왕이 총애했던 왕실 외척 출신 명장 남이(1441~1468)를 역모로 몰아 처형한 일이었다.
예종의 뒤를 이어 의경세자(추존왕 덕종)의 차남이 왕이 됐다. 제9대 성종(1457~1494)이다. 그는 사림파를 중용하는 등 개혁 정치를 펼쳤지만, 최악의 패착을 했다. 자신이 사사(賜死)한 폐비 윤씨의 아들에게 제10대 왕위를 물려줬다.
'폭군' 연산군(1476~1506)은 두 차례 사화(무오·갑자)를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여색과 주지육림에 빠져 조선의 근간을 흔들었다. 특히 1504년 무렵에는 큰아버지 월산대군(1454~1488)과 사별한 큰어머니 박씨를 능욕하는 패륜까지 저지른 것으로 전해진다.
수치심을 느낀 박씨가 자결한 뒤 분노한 남동생 박원종(1467~1510)이 중심이 돼 1506년 9월 반정을 일으켰다. 이들은 연산군을 축출하고, 그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을 왕위에 올렸다.
중종은 영의정을 지낸 신수근(1450?~1506)의 딸과 혼인한 상태였다. 연산군과 처남과 매부 사이였던 신수근이 반정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반정 세력에게 살해되면서, 부인 신씨는 중전(단경왕후)이 됐다가 일주일 만에 폐위됐다.
정순왕후는 동망봉에 서서 한양도성 안에서 벌어진 이 혼란상도 지켜봤을 것이다.
동망봉은 그 일대가 일제강점기에 채석장이 되면서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은 '숭인근린공원' 안에 표지석이 세워져 그 자리를 전한다.
![[서울=뉴시스] 종묘 정전. (사진=국가유산청)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g1.newsis.com/2026/03/16/NISI20260316_0002084512_web.jpg?rnd=20260316094724)
[서울=뉴시스] 종묘 정전. (사진=국가유산청) *재판매 및 DB 금지
◇종묘
1698년 11월 숙종은 약 240년 동안 역모의 수괴로 여겨졌던 노산군을 노산대군으로 추봉한 데 이어 왕으로 복위시켰다. 묘호를 ‘단종’으로 정했다.
1452년 5월 12세에 즉위했다가 3년 만에 폐위됐던 이홍위는 왕으로 복귀했다.
역시 어린 나이(14세)에 왕위에 올랐던 숙종의 동병상련이었을까. 숙종은 단종과 달리 왕위를 위협할 숙부가 없었고, 단종에게는 없었던 어머니(현종비 명성왕후 김씨)의 수렴청정과 외척의 보호 속에서 성년을 맞을 수 있었다.
정순왕후 역시 함께 복권됐다.
다만 정순왕후의 사릉(思陵)은 지금의 경기 남양주시에 있어 부부는 나란히 묻히지 못했다.
그래도 두 사람의 신주는 지금의 종로구 훈정동 ‘종묘’(宗廟)에 함께 모셔졌다. 영도교에서 갈라진 뒤 살아서도, 죽어서도 끝내 만나지 못했던 두 사람은 신주로나마 재회할 수 있었다.
숙종의 아들은 정순왕후의 아픈 사연을 서울의 땅 위에 남겼다.
제21대 영조(1694~1776)는 1771년 정업원의 옛 자취를 기리기 위해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비를 세웠다. 그는 '정업원 옛 터 신묘년 9월6일에 눈물을 머금고 썼다'(净業院辛九月六日飲書)는 글을 비에 남겼고, 비각 현판에는 '앞산 뒷바위 천만년을 가오리'(前後於千萬年)'라고 적었다. .
비와 비각은 청룡사 옆에 남아있다.
영조는 정순왕후의 절절한 사부곡(思夫曲)이 전해지는 봉우리에는 ‘東望峰’이라는 이름을 남겼지만, 일제강점기에 채석 작업으로 동망봉이 훼손되면서 사라졌다.

【서울=뉴시스】서울 종로구 숭인근린공원 내 ‘동망정’. (사진=한국관광공사) *재판매 및 DB 금지
◇압구정
전혀 다른 의미로 단종의 비극과 맞닿은 공간도 있다.
대한민국 대표 부촌인 강남구 압구정동의 지명이 된 ‘압구정’(狎鷗亭)이다.
‘압구’(狎鷗)는 갈매기와 벗하며 사는 삶’을 뜻하는 말로, 세속을 벗어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이상을 담고 있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권력을 장악한 1453년 10월 ‘계유정난’의 일등공신 한명회(1415~1487)는 호화롭게 꾸민 정자를 ‘압구정’이라 이름 붙였다.
한명회는 두 딸을 각각 예종과 성종의 왕비로 들였지만, 모두 20세도 되지 못해 세상을 떠났고 왕통도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1487년 10월 세상을 떠났으나, 1504년 갑자사화 당시 폐비 윤씨 사건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압구정 역시 한명회의 몰락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지금은 표지석이 그 자리를 전하고 있을 뿐이다.
숭인근린공원을 조성할 때 정순왕후를 기리기 위해 ‘동망정’(東望亭)이 세워진 것과 대조적이다.
정업원의 ‘정업’(淨業)은 ‘속세의 업을 깨끗이 씻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진짜로 업을 씻어야 했던 이들이 따로 있었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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