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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립 잡기노트]선지자 박정희, 순교자 노무현, 그리고 詩

등록 2013.05.25 07:58:00수정 2016.12.28 07: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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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358>  시인 112명이 흥선대원군에서 이태석까지 한국 근대인물 112인을 시로 쓴 책이 ‘사람’이다. ‘시로 읽는 한국 근대인물사’를 표방한다. 사람 이름이 곧 시 제목이다.  문화부장 reap@newsis.com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358>

 시인 112명이 흥선대원군에서 이태석까지 한국 근대인물 112인을 시로 쓴 책이 ‘사람’이다. ‘시로 읽는 한국 근대인물사’를 표방한다. 사람 이름이 곧 시 제목이다.  

 ‘박정희’ 시를 거두절미 취사선택하면 “당신은 날이 갈수록 빛나는 전설입니다. 언제까지나 꺼지지 않을 우리의 횃불입니다. 빈곤과 수난의 역사에 눈부신 신화를 낳았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넘어 오늘의 번영을 불렀습니다. 위대한 지도자요, 탁월한 선지자였습니다. 5·16은 쿠데타로 잉태해 혁명으로, 개발독재는 애국독재로 승화됐습니다. 5·16 쿠데타와 유신독재가 없었다면 민족중흥과 경제발전은 과연 어떻게 됐을는지요”다.  

 ‘이병철’ 시는 “기업보국을 꿈꾼 선각이었다. 빛나라, 그 갸륵한 뜻, 그 맑은 의로움!”, ‘정주영’ 시는 “굽이굽이 격동의 세월 속에서 오로지 빈곤의 내 동포만을 건강하게 잘 살게 하고팠던 아산”이다.  

 시집을 엮은 한국시인협회 신달자 회장은 “우리 근대사의 주요한 인물들이 남긴 빛과 그늘을 문학의 눈으로 살펴보고자 하였다. 문학은 그들의 선택이 오늘날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그들이 어떤 사람으로 비쳐지고 있는지를 정의하고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삶과 선택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언뜻 월스트리트의 제시 리버모어의 투자원칙 가운데 하나가 떠오른다. 리버모어는 개인이 인류사의 위대한 발견을 이끈다고 봤다. 단체가 아니다. 위대한 사상과 부, 그리고 테크놀러지, 정치, 의료의 획기적 전진은 개인의 아이디어와 의지에서 비롯됐다는 주장이다.  

 하버드 의대 행동의학프로그램 디어드리 배릿 교수(진화심리학)는 “위대한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지어내 어떤 극을 연기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감동시키고,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가 주변사람들과 어울리며 같은 시간을 보냈다면 도달하지 못했을 보다 나은 관점으로 그 가상의 상호작용을 바라보게 한다”고 문학의 존재이유를 평가했다.

 호모사피엔스라면 문학을 우러러야 한다. 게다가 배설의 소설보다 변비의 시는 더욱 정제돼 있다. ‘사람’들을 지은 시인들의 인물평은 정답일 수도 있다. 코페르니쿠스와 다윈의 혁명도 당대의 가치와 도덕에 위배됐지만,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래도 ‘사람’ 시들을 인정 못하겠다면, ‘용비어천가’도 시라는 팩트를 거부하련다면, 이 시집에 참여하지 않은 시인 고은의 ‘만인보’를 읽어봄 직하다. 그는 박정희를 이렇게 읊었다. “녹슨 쇳소리. 그의 파쇼는 성난 독사였다. 탄압과 건설이 행여 뒤질세라 마구잡이 솟구쳤다. 어느덧 춘궁기 보릿고개가 사라졌고 전란 이후 휴전선 이남의 산야는 천박한 근대화 조국 근대화 개발의 나라 성장의 나라였다. 가발공장에서 원자로였다. 그런 어느날 쉬쉬쉬 또다시 소문이 돌았다. 감옥 지붕의 비둘기들이 우르르 날아오르며.”

 ‘사람’에서는 노무현이 빠졌다. “인물이 너무 정치적으로 쏠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김대중과 박정희만 넣어도 우리나라 정치를 짚을 수 있을 것 같았다”는 해명이다. 이 말이 변명으로 들린다면, 비교문학자 임철규 명예교수(연세대 영문학)를 찾아 읽으면 그만이다.

 임철규는 노무현의 죽음에서 카토를 봤다. 카토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인이다. 원로원파에 의해 공화정의 적으로 규정된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맞서 싸우다 내전에서 패배하자 우티카에서 플라톤의 ‘파이돈’을 읽으며 생애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 뒤 칼로 배를 갈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음을 통해 공화정의 정치적 가치에 대한 충성을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다.

 임철규는 “카토의 자살이 자유를  위한 순교였다면, 노무현의 자살은 진보를 위한 순교였다. 이런 의미에서 노무현의 죽음은 그뿐 아니라 그를 애도했던 우리의 운명”이라고 해석했다. 또 “그는 유언에서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고 말했다”며 “모든 계급 또는 계층 간의 갈등이 소멸되고, 더 이상 서로를 원망함이 없이 연민과 사랑의 감정으로 서로의 아픈 상처를 씻어주는 그런 사건으로 만드는 것이 그의 죽음으로부터 부여된 우리의 운명”이라고 이해했다.

 시도 인용했다. 미국 시인 스티븐스의 서정시 ‘일요일의 아침’이다. “스티븐스가 ‘죽음은 아름다움의 어머니다’라고 노래했듯, 진정 노무현의 죽음은 아름다움의 어머니로서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특정인에 대한 판단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시인 서정주가 어쩌고, 소설가 김동리가 저쩌고, 가깝게는 시인 김지하가 그랬고…. 이런 유의 시비는 되풀이요, 소모인지도 모르겠다.

 문화부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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