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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팬-가요팬, 상암 '성지' 쟁탈전…"잔디 훼손" vs "관리 못하고 핑계"

등록 2024.09.19 09:17:16수정 2024.09.19 11: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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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팬들, 콘서트로 인한 잔디 훼손 반발

흔들리는 한국 축구계 위기의식의 발로

'고객 유치' 중요한 서울시, 곤란한 입장

[서울=뉴시스]2023 K리그1 FC서울 vs 대구. 2023.04.08. (사진=서울시설공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2023 K리그1 FC서울 vs 대구. 2023.04.08. (사진=서울시설공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박대로 기자 = '성지'(聖地)란 종교의 발상지나 순교가 있었던 지역을 뜻한다. 종교인들은 신성시되는 이곳들을 순례하며 신앙심을 고취하고 새로운 종교적 경험을 얻는다.

문제는 이 성지를 여러 종교가 공유할 때 나타난다. 대표적인 사례가 예루살렘이다.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가 나란히 예루살렘에 성지를 두고 있다. 유대교의 통곡의 벽, 이슬람교의 알 아크사 사원, 기독교의 성묘교회가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각 종교가 성지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면서 예루살렘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로마의 유대 정복, 우마이야 왕조의 예루살렘 정복, 십자군 전쟁, 이스라엘 건국 전쟁, 수차례에 걸친 중동전쟁 등이 모두 성지를 독차지하려는 시도였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간 전쟁 역시 이 흐름과 무관치 않다.

2024년 한국에서도 '성지'를 둘러싼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 축구계와 가요계가 공동의 성지 격이 된 서울월드컵경기장을 놓고 맞붙고 있는 것이다.

2001년 개장한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원래 축구의 성지였다. 2002 국제축구연맹(FIFA)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현장이며 영국의 세계적인 축구 전문지 '월드 사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10대 축구 경기장 중 하나다.

한일 월드컵 이후로도 이 경기장은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홈구장으로 쓰이고 있다. A매치가 열릴 때마다 손흥민 등 스타플레이어들을 보기 위해 만원 관중이 몰려들고 있다. 프로축구 K-리그1 명문 FC서울은 서울월드컵경기장을 홈구장으로 쓰며 관중 몰이를 하고 있다. 지난 5월에는 5만2600명을 불어 모아 2013년 승강제 도입 이후 K리그1 단일경기 역대 최다관중 신기록까지 수립했다.

동시에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전 세계적으로 각광 받고 있는 한국 가요, 즉 K-팝의 성지이기도 하다.

'문화 대통령' 서태지를 비롯해 한류그룹 '빅뱅', 빅뱅 리더 지드래곤, '강남스타일'의 싸이 등이 이미 수년 전 이곳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며 위상을 과시했다.

올해 들어서도 이곳에서 대규모 콘서트가 잇달아 열리고 있다. 2015년 데뷔한 다국적 보이그룹인 '세븐틴(SVT)'이 지난 4월, 한국 트로트계를 평정한 임영웅이 지난 5월 단독 콘서트를 열었고 오는 21일과 22일 아이유가 여성 솔로 가수로는 역대 최초로 이곳에서 공연을 앞두고 있다.

특히 솔로 가수가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여는 것은 의미가 남다르다. 5만석 안팎의 객석을 채울 수 있는 티켓 파워를 비롯해 대중적 호감도와 인지도, 음악성 등을 두루 인정 받아야 대관에 성공할 수 있다.

K-팝에서 서울월드컵경기장 위상은 서울 시내에 있는 다른 공연 시설인 KSPO돔, 고척돔 등을 크게 뛰어넘는다. 그간 초대형 콘서트가 열렸던 잠실종합운동장이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가면서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서울 시내 공연장으로는 독보적인 위상을 갖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서울월드컵경기장이 '공동의 성지'가 된 가운데 이번 아이유 콘서트를 앞두고 정면충돌이 벌어졌다.

논란의 시작은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손흥민이다.

손흥민은 지난 5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 조별리그 B조 팔레스타인과의 1차전에서 0-0으로 비긴 뒤 잔디 상태에 불만을 표했다.

손흥민은 경기 후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에서 취재진을 만나 서울월드컵경기장 잔디에 문제가 있다고 언급했다. 그는 "오만 원정 경기의 그라운드 컨디션이 더 좋다는 것이 한편으로 안타깝다"고 했다. 잔디 문제를 대놓고 꼬집은 것이다.
[서울=뉴시스] 빅뱅 콘서트. 2017.06.10. (사진=서울시설공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빅뱅 콘서트. 2017.06.10. (사진=서울시설공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이후에도 손흥민은 잔디 문제를 거듭 제기했다. 그는 지난 10일 오만 무스카트의 술탄카부스 경기장에서 치른 오만과의 원정 경기에서 3-1로 승리한 뒤 "홈에서 할 때 (잔디가) 개선됐으면 좋겠다"며 "원정 경기 그라운드 컨디션이 더 좋다는 게 한편으로는 안타깝고,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쐐기를 박았다.

손흥민이 깃발을 내걸자 이를 계기로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9월에 열릴 아이유 콘서트에 대한 우려와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급기야 국민신문고와 서울시 등에 '오는 10월 대한민국과 이라크의 북중미 월드컵 예선 경기까지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잔디 관리를 위해 다가오는 아이유 콘서트를 즉각 취소해 달라'는 민원이 제기됐다.

아이유 팬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아이유 갤러리' 팬들은 지난 15일 "월드컵경기장의 '잔디 문제'는 전적으로 서울시설공단의 관리 소홀 책임으로 서울시설공단을 관리·감독하는 서울시는 잔디 문제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서울 시민에게 사과의 입장을 밝히는 것이 도리인데 마치 아이유 콘서트 여파로 내년부터 월드컵경기장 그라운드석 판매가 제외된 것처럼 여론을 호도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반발했다.

이 같은 상황을 두고 일각에서는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 나온다. 한국 축구의 위상은 예전만 못한 가운데 K-팝은 전 세계 가요 시장을 호령하며 위상을 높여왔다. 축구계의 성지 독점을 인정하기에는 K-팝의 기세가 무서울 정도다.

잘나가는 K-팝과 달리 한국 축구는 2002 한일월드컵 4강 이후 이에 필적하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숙명의 라이벌인 일본 축구에 밀리는 상황에서 위르겐 클린스만 전 대표팀 감독 선임을 둘러싼 의혹,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을 향한 퇴진 압박, 홍명보 신임 대표팀 감독 선임을 둘러싼 잡음 등 내홍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처럼 축구팬들의 신뢰를 잃어가는 대한축구협회 행정과 달리 K-팝은 BTS의 전 세계적인 성공에 이어 블랙핑크, 뉴진스 등이 세계 무대에서 각광 받으며 성공 시대를 열고 있다.

이 때문에 잔디 훼손을 둘러싸고 터져 나온 축구팬들의 불만들은 위기의식의 발로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높아진 축구팬의 눈높이와 이를 충족하지 못하는 기성 축구계, 그리고 이 빈틈을 공략하는 K-팝 등이 빚어낸 것이 이번 잔디 훼손 논란이라는 것이다.

갈등이 빚어진 상황에서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운영하는 서울시 산하 서울시설공단으로서는 어느 쪽 손도 들어주기가 어렵다. 축구계와 가요계가 모두 대관료를 안겨 주는 '고객'인 탓에 서울시로서는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옹호할 수 없는 것이다.

갈수록 갈등이 증폭되자 서울시는 지난 14일 보도자료를 통해 내년부터 콘서트 등 문화행사에는 그라운드석 판매를 제외하고 대관을 허용한다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시는 "국내외에서 K-Pop 콘서트 관람에 대한 지속적인 수요가 있고 현재 서울에 2만명 이상 관람객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공연장이 없는 상황이어서 그라운드석 판매를 제외한 부분 대관만 허용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서울시가 중립 자세를 취하면서 축구계와 가요계가 성지를 공유해야만 하는 상황은 당분간 이어지게 됐다.

국내 공연 가능 시설 중 고척돔이 1만6000여명, KSPO돔(올림픽체조경기장)이 1만5000명, 인천 영종도 인스파이어 아레나가 1만5000명 등 관객을 모을 수 있지만 2만명에는 미치지 못한다. 2027년 창동에 들어설 서울아레나도 1만8000여석 정도다. 1회 공연에 5만명 이상을 들일 수 있고 이틀 일정이면 10만명까지 동원할 수 있는 서울월드컵경기장과는 비교 자체가 어려운 수준이다.

서울시로서는 향후 수년 간 축구팬과 K-팝 팬을 모두 만족시켜야 하는 난제를 떠안게 됐다. 시는 "그라운드석을 제외한 문화행사 대관 조치 시행은 물론 잔디 상시 정비 및 신속 복구로 축구선수들이 최상의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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