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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년 전 크리스마스 악몽…166명 숨진 '대연각호텔 화재'

등록 2025.12.25 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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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뉴시스】김지호 기자 = 1971년 12월25일 서울 중구 충무로1가에서 발생한 대연각호텔 화재사고 당시 모습. 이 사고는 163명이 숨지고 63명이 다치는 등 모두 226명의 사상자가 나왔던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화재로 기록됐다. (사진=소방청 국가화재정보시스템 제공) photo@newsis.com

【수원=뉴시스】김지호 기자 = 1971년 12월25일 서울 중구 충무로1가에서 발생한 대연각호텔 화재사고 당시 모습. 이 사고는 163명이 숨지고 63명이 다치는 등 모두 226명의 사상자가 나왔던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화재로 기록됐다. (사진=소방청 국가화재정보시스템 제공)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강세훈 기자, 정풍기 인턴기자 = 54년 전 오늘(1971년 12월 25일), 서울 명동 한복판에 있던 21층 규모 대연각호텔에서 참사가 발생했다. 

사고의 발단은 1층 커피숍에서 발생한 LPG 가스 폭발이었다. 폭발과 함께 시작된 화재는 순식간에 위층으로 번졌고, 건물 전체가 거대한 화염 기둥으로 변했다.

공식 집계된 사망자는 166명, 실종자를 포함하면 약 190명에 달한다. 이는 한국 현대사 단일 호텔 화재 중 최악의 인명 피해로 기록됐다.

24일 TV뉴시스는 '크리스마스 아침, 자고 있던 호텔에서 불이 난다면'이라는 영상으로 이 사건을 조명하며, 당시 참사의 심각성과 교훈을 되새겼다.



평온했어야 할 크리스마스 아침, 잠들어있던 호텔 투숙객들을 깨운 건 예고 없이 터진 소음과 매캐한 연기였다.
 
1층에서 발생한 불은 순식간에 위층으로 번졌고, 불길과 연기는 건물을 타고 위로 치솟으며 호텔은 거대한 화염 기둥으로 변했다.
 
대연각호텔 화재 참사는 우리 사회의 건축·소방 안전 체계를 근본적으로 뒤바꾼 계기가 됐다.

전문가들은 이 참사가 단순한 화재 사고가 아니라 당시 건축법의 구조적 한계가 만들어낸 '인재(人災)'였다고 지적한다.

대연각호텔은 당시 기준으로는 초고층 건물이었지만, 화재 확산을 차단해야 할 방화구획 개념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계단과 복도가 하나로 연결돼 있었고, 불과 연기를 막아줄 방화문이나 방화벽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계단은 불길과 유독가스를 위층으로 끌어올리는 '굴뚝' 역할을 했다. 불은 막히지 않았고, 연기는 빠져나가지 못했다. 1층에서 시작된 화재는 건물 전체로 빠르게 퍼졌고, 내부에는 가연성 목재 소재가 광범위하게 사용돼 피해는 더욱 커졌다.

함은구 을지대 안전공학전공 교수는 "당시 대연각호텔은 화재에 대응할 만한 이런 시설과 설비가 전혀 없던, 완전히 화재에 무방비 상태의 건물이었다"며 "건물의 마감 재료가 내화 구조로 돼 있어야 했는데 당시 한지가 사용됐다. 특히 문제가 됐던 부분은 방화문(현관 출입문)이 모두 목재로 돼 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소방 대응이 늦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가까운 소방서와 호텔의 거리는 약 700m로, 초기 화재 인지와 출동은 비교적 신속하게 이뤄졌다.

문제는 구조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 대한민국에 보유된 고가 사다리차는 단 한 대뿐이었고, 최대 도달 높이는 7층에 불과했다. 20층이 넘는 호텔에 갇힌 투숙객들을 구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옥상 출입문마저 잠겨 있어, 사람들은 각 층 창문에 매달린 채 구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연기와 불길에 몰린 일부 투숙객들은 매트리스에 몸을 묶은 채 창밖으로 몸을 던지는 극단적인 행동에 내몰렸다.

당시 주한 대만 대사관의 위셴룽 공사도 이 호텔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11층 객실에 있다가 화재 발생 10시간 만에 구조됐지만, 심각한 호흡기 화상을 입었고 결국 후유증으로 숨을 거뒀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스프링클러, 화재 경보 설비, 자동 소화 시스템은 당시 대연각호텔에 존재하지 않았다.

불을 감지하고, 초기 확산을 막을 최소한의 장치조차 갖춰지지 않았던 것이다.  화재를 '끄는 장치'뿐 아니라, 불을 '가두는 장치' 자체가 없었던 셈이다.

이 참사를 계기로 국내 화재 안전 기준은 대대적인 변화를 겪었다.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에는 스프링클러 설치가 단계적으로 의무화됐고, 고층 건물에는 헬기 착륙장 설치 기준이 도입됐다.

또 방화구획·방화문 설치, 내화 마감재 사용, 피난 계단과 비상구 확보, 옥내소화전과 화재 경보 설비 등 건축 단계에서의 화재 안전 기준이 전면적으로 강화됐다. 대형 건축물의 화재보험 가입 역시 '선택'이 아닌 '책임'으로 규정됐다.

화재 대응 방식도 달라졌다. 과거처럼 무조건 건물 밖으로 뛰쳐나오는 방식이 아니라, 불이 난 위치와 상황에 따라 대피할지, 내부에서 버틸지를 사전에 설계하는 개념이 자리 잡았다.

강윤진 한국화재소방학회장은 "대연각호텔 화재로 인해서 많은 제도들이 바뀌었다. 외벽, 단일재나 마감재는 불연 또는 준불연 성능을 쓰도록 의무화됐고 전층 스프링클러 설비, 설치 의무화가 이뤄졌다"며 "연기, 열감지기의 다중 설치 및 조기 경보 체계가 강화됐고 화재 발생 시 자동으로 설비가 작동하는 통합 화재 제어 시스템이 도입됐다"고 설명했다.

대연각호텔 화재는 단지 제도 변화만 남긴 것이 아니었다. 그날 호텔에 머물던 두 명의 젊은 청년도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이 남긴 것은 세상에 발표되지 못한 채 남겨진 한 곡의 노래였다.

사고로부터 6년 뒤, 그 노래는 대학가요제 무대에서 '젊은 연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공개됐다. 불길 속에서 세상에 나오지 못했던 노래는, 남겨진 이들의 손을 거쳐 비로소 사람들 앞에 전해졌다.

54년 전 크리스마스 아침의 설렘은, 그렇게 참사로 바뀌었다.

화재는 언제든, 어디서든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피해의 크기는 '대응'이 아니라 '준비'에 의해 갈린다. 대연각호텔 화재가 지금까지도 되풀이해 언급되는 이유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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