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
  • 트위터
  • 유튜브

[변연배의 이야기와 함께하는 와인] 와인 역사에 연개소문 등장이라

등록 2023.02.18 06:00:00

  • 이메일 보내기
  • 프린터
  • PDF
[서울=뉴시스] 영화 '안시성' 중 당 태종 이세민의 침공 모습. (사진=NEW 제공)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영화 '안시성' 중 당 태종 이세민의 침공 모습. (사진=NEW 제공)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중국 산둥반도 일대는 중국 와인의 40%를 생산하는 제1의 산지이다. 그 중에서도 연태(煙臺) 지역이 중심이다. 이곳의 와인 역사에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인물도 등장한다.

명나라의 장황(章潢, 1527~1608)이 편찬한 ‘도서편’(圖書篇)에는 “수나라와 당나라가 망한 것은 고구려와 관련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수나라(581~619)는 단 2대, 38년 만에 단명했다.

수나라는 598~614년 16년간 네 차례나 고구려를 침공했다. 고조 수 문제는 1차 침공에 실패한 후 고구려 원정을 중단했다. 하지만 2대 수 양제는 612년 300만명이 넘는 병력을 동원해 2차 침공에 나선다. 수서와 삼국사기에 따르면, 당시 수나라 인구는 5000만명이었는데, 고구려 침공에 전투 병력 113만3800명과 병참 인력 200만명 이상을 투입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세계사에서 단일 전쟁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한 전쟁으로 꼽힌다.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은 같은 해 7월 살수에서 우중문(于仲文)과 우문술(宇文述)이 지휘하던 30만 수나라군을 거의 전멸시킨다. 오직 2700명만이 살아 돌아갔다. 한민족 야전사에서 가장 큰 승리로 일컬어지는 ‘살수대첩’이다. 우문술과 우중문은 귀국 후 수 양제에게 모멸적인 처벌을 받았다. 전쟁 탓에 국력이 소진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618년 수 양제는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피살당하고, 결국 수나라는 멸망한다. 고구려를 잘못 건드린 대가는 컸다.

그로부터 25년 후인 644년 6월, 신생 당나라의 2대 황제인 태종 이세민은 수륙 군사 80만명과 지원 병력 20만명으로 편성된 10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고구려를 침공한다. 645년 5월 중순 그는 요동에 도착했다. 와인을 좋아해 장안의 궁전에 포도원을 가꾼, 바로 그 당 태종이다.

수군 10만명과 함대 1000척이 등주(登州, 오늘날 연태 지역)에서 출발했다. 고구려에는 연개소문(淵蓋蘇文, 594~666)이 있었다. 당나라군은 60일 넘게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20만명이 넘는 병력만 잃고 645년 9월 철수한다. 이때 안시성주 이름이 남아 있지 않아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한탄했다. 안시성주로 알려진 양만춘은 명나라 소설 ‘당서지전’(唐書志傳)에 처음 나오는 인물로, 정사에는 근거가 확실치 않다.

645년 10월 당 태종은 후미에서 추격하는 고구려군에 쫓기면서 요택(遼澤, 오늘날 하북성 조양현 일대의 늪지대)을 건너 패주했다. 많은 군사를 잃고 가까스로 돌아온 당 태종은 원정을 말렸던 충신이자 와인 양조 전문가인 위징(魏徵, 580~643)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는 유언도 남겼다. (‘신당서 고려전’ ‘자치통감’ ‘삼국사기 고려본기’ 등 기록)

신채호는 ‘조선 상고사’에서 고구려군이 베이징 일대의 내륙까지 당 태종을 추격했다며, 중국의 사서는 왜곡됐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고려성·고려진 등 베이징 외곽에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고구려 관련 지명을 들었다.

실제로 산둥반도 북서쪽 하북성(河北省)과 남쪽 강소성(江蘇省) 등 여러 지역에 관련 설화와 유적이 남아 있다. 설화는 연개소문에게 쫓기던 당 태종을 설인귀(薛仁貴, 614~683)가 겨우 구출했다는 내용이다. ‘독목관’(獨木關) ‘어니하’(淤泥河) ‘살사문’(殺死門) ‘분하만’(汾河灣) 같은 경극에도 연개소문이 ‘날아다니는 칼’(비도, 飛刀) 5개를 찬, 신출귀몰하는 장수로 나온다. 설인귀와 연개소문이 주연이고 당 태종은 조연이다.

산둥반도 연태 지역에도 이와 비슷한 전설과 야사가 전해진다. 와인과도 관련이 있다.

청나라 시절 편찬된 ‘마산지’(馬山志)와 ‘즉묵향토지’(卽墨鄕土志)에 기록이 있다. 643년 연개소문은 당 태종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먼저 등주에 상륙한 후 마침 평도(平度, 오늘날 청도 지역) 근처 즉묵(卽墨)의 마산(馬山)에서 지형을 정찰하던 당 태종을 기습, 그에게 항복을 받기 직전까지 갔다. 이때 신라 출신 용양장군 김걸(金杰)이 나서 당 태종을 구하고 전사한다. 당 태종은 훗날 이 지역 백성들의 노고를 치하해 와인과 포도나무를 하사했다. 김걸은 중국의 사서와 ‘삼국사기’에도 나오는 신라 출신 설계두(薛罽頭, ?~645)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신당서’에는 그가 645년 고구려와의 주필산 전투에서 당 태종을 구하다 전사했다고 나온다. 또 강희제 5년(1535년) 이세창(李世昌)이 지은 ‘평도주지’(平度州志)에는 646년 당 태종이 평도에서 연개소문과 전쟁을 벌인 후 백성들에게 포도나무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포도는 ‘용안’(龍眼)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사자안’(獅子眼)이라 고쳐 불렀다는 내용도 있다.

그러나 정사에는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 중 산둥반도에 간 적이 있다는 기록이 없다. 산둥반도와 고구려 비사성(오늘날 다롄 근처)이 있던 요동반도는 바닷길로 150㎞ 남짓 되지만, 육로로는 1500㎞가 넘는다. 645년 요동에서 패주하던 당 태종이 장안과 반대 방향인 산둥반도를 거쳤을 가능성은 낮다. 643년 당 태종이 산둥반도에 왔다면 수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마산지’에는 산둥에서 당 태종이 연개소문과 조우한 때가 643년이라고 나온다. 645년은 그 2년 후가 되니 다시 요동에 올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자, 기록하는 자의 기억이다.

▲와인 칼럼니스트·경영학 박사·딜리버리N 대표 [email protected]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