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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이 당한 수모 이 갈며 봤다"…이한열 열사 생애기록 38건 복원

등록 2021.06.08 12:00:00수정 2021.06.09 13:3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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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 2월부터 3개월 걸쳐 복원

어머니 글에선 임종 전 감정 고스란히

최루탄 피격 사인 밝힌 부검결과 기록도

【서울=뉴시스】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한열동산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32주기 추모식 장소에 이 열사의 영정이 놓여 있다. (사진= 뉴시스 DB)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한열동산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32주기 추모식 장소에 이 열사의 영정이 놓여 있다. (사진= 뉴시스 DB) [email protected]

[세종=뉴시스] 변해정 기자 =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이한열 열사의 생애 기록 38건이 복원됐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이 열사의 생애 기록 38건을 복원해 8일 온라인으로 첫 공개했다.

이 열사는 1987년 6월9일 연세대 교문 앞에서 전두환 정권 규탄 시위에 나섰다가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져 한 달 후인 7월5일 숨졌다. 그의 죽음은 6월 민주 항쟁의 기폭제가 돼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이번에 복원된 기록은 이한열기념사업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 열사의 유품이다.

이 열사가 고교생 시절에 쓴 일기 'My Life'와 고교생특별수련기, 이 열사의 어머니인 배은심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명예회장의 글, 압수수색 영장·부검 결과 등 6월 항쟁 관련 기록들이 있다.

지난해 5월 이한열기념사업회로부터 의뢰를 받아 올해 2월 중순부터 약 3개월에 거쳐 복원했다.

복원 요청 당시 산성화와 함께 물 얼룩으로 재질 변색이 심했고 찢어져 있었다. 탈산제에 의한 백화 현상으로 가독성도 저하된 상태였다.

국가기록원은 클리닝→오염 제거→결실부 보강→중성화 처리를 통해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인화 사진의 경우 이물질·얼룩·스크래치를 제거하고 고해상도 디지털 파일로 복원했으며, 아날로그 테이프도 디지털화했다.

기록물을 보면 이 열사의 일기 'My Life'는 17세 고교 시절 50여 일의 겨울방학 기간에 쓴 것으로, 학생으로서의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뿐 아니라 삶과 세상에 대한 진지함과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이 잘 나타나 있다.   

[세종=뉴시스] 이한열 열사가 17세 고교시설 50여일의 겨울방학 기간에 쓴 일기 'My Life'. (자료= 국가기록원 제공) 2021.06.08.

[세종=뉴시스] 이한열 열사가 17세 고교시설 50여일의 겨울방학 기간에 쓴 일기 'My Life'. (자료= 국가기록원 제공) 2021.06.08.

이 열사는 1982년 12월26일에 "나는 우리 선조들이 당한 수모를 이를 갈며 보았다. 더욱 더 힘을 길러 강국이 되어야 겠다는 굳은 결의가 나의 가슴을 스쳐갔다. 만일 대한제국이 무사히 지속되었더라면 지금쯤 우리나라는…역사 속에 만일이란 있을 수 없다"라고 적었다.

1982년 12월31일에는 "17세의 이 나이에 나는 과연 무엇을 남겼는가?…오늘은 한해를 보내는 기분이 다른때와는 전혀 다른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나는 한해 한해 나이 먹기를 원했으며 빨리컸으면 하는 생각이었다…올해는 무엇보다도 정신적 바램이 컸던 해라고 본다. 나의 생각 나의 사상은 점점 어떤 확고한 가치관을 통해서 한발 한발 나아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라고 썼다.

이듬해 1월3일에는 "오후에는 '도산사상'이란 책을 읽었다. 우리 민족의 선각자인 안창호 선생의 사상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 "성실"이란 두글자가 내 마음을 몹시 흥분하게 했다. '성은 하늘의 도리요, 성(誠)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라' 그렇다. 인간은 모든 일에 완전할 수 없다. 인간의 참 모습은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또 한층 노력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들이다."라고 써내려갔다. 

또 이 열사의 신문에 실린 새마을 수련회 참가기와 당시 부모님께 쓴 편지에는 수련을 통한 깨달음과 국민과 국가에 대한 성숙한 인식이 담겨져 있다. 이 열사는 1984년 당시 편지에서 "학과시간에는 저명한 인사들의 강의를 통하여 우리의 자아를 기르고, 우리의 역사를 배우고, 국민의 한사람으로서의 올바른 자세를 배우며, 제 자신을 이기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수련을 통하여 지금까지 제 자신에게 결여되었던 점을 보충할 수 있었고, 좀 더 성장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앞으로는 아버님, 어머님께 좀 더 걱정을 덜어드리고, 어엿한 자식이 될 겁니다."라고 썼다.

이 열사 어머니의 애끓는 심정을 알 수 있는 기록도 있다.

'1987년 6월 9일 5시 5분경'으로 시작하는 글에서는 "우리는 떨리는 걸음으로 중환자실 문으로 들어갔다. 우리 한열이가 왜 그래요? 정말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의식이 없고 코, 입, 산소 호흡기를 온몸에 착용해서 이름도 모르는 기계에 의해 호흡하고 있었으니...27일 동안을 말 한마디 못해 보고... 한열이는 7월 5일 2시 5분에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라고 적어 학교로부터 위독한 상황을 전달받은 순간부터 중환자실에서 임종을 맞이하기까지 겪었던 사건과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6월 항쟁과 관련한 기록에는 사망 이후의 '압수수색 검증영장'과 '부검결과 이물질 규명 중간보고' 기록도 포함돼 있다.
 
[세종=뉴시스] 이한열 열사 어머니의 글(1987년). (자료= 국가기록원 제공) 2021.06.08.

[세종=뉴시스] 이한열 열사 어머니의 글(1987년). (자료= 국가기록원 제공) 2021.06.08.

이 중 중간보고는 이 열사의 당시 주치의가 부검 과정을 수기로 남긴 1페이지 기록으로, 이 열사의 머릿 속에서 발견된 이물질의 분석 내용과 직접적인 사인이 '최루탄 피격'임을 밝히고 있다.

이외에도 6월 항쟁의 현장이 담겨있는 사진도 대거 복원됐다. 명동성당 시위 현장, 이 열사 영결식 때 이애주 선생의 살풀이 춤, 영결식에 참여한 연세대 백양로 인파 등이다.
 
 '민주국민장 실황'이 녹음돼 있는 오디오 테이프(파일) 역시 복원했다. 이 파일에는 1987년 7월9일 거행된 이 열사의 영결식에서 고(故) 문익환 목사의 추도사와 이 열사 어머니의 오열하는 음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경란 이한열기념사업회 관장은 "이한열의 기록은 1980년대 사회 운동에 나섰던 학생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행동으로 나서게 됐는지를 보여준다"며 "귀중한 자료를 복원할 수 있게 돼 감사하다"고 말했다.

곽 정 국가기록원 복원관리과장은 "이 열사의 생애기록과 6월 항쟁 기록은 1980년대 시대상과 민주주의 역사를 대변하는 중요한 현대사 기록이며 필사본이자 유일본으로 그 사료적 가치도 매우 높다"며 "6·10 민주항쟁 34주년을 앞두고 제공할 수 있어서 더욱 기쁘다"고 언급했다.

복원된 기록물 원문은 국가기록원(http://www.archives.go.kr)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향후 이한열기념사업회(www.Ieememorial.or.kr)와 e-뮤지엄(http://www.emuseum.go.kr)에서도 공개될 예정이다.


[세종=뉴시스] 6월 항쟁 관련 기록인 이한열 열사의 사망 이후의 '압수·수색 검증영장'(左)과 '부검결과 이물질 규명 중간보고'(右). (자료= 국가기록원 제공) 2021.06.08.

[세종=뉴시스] 6월 항쟁 관련 기록인 이한열 열사의 사망 이후의 '압수·수색 검증영장'(左)과 '부검결과 이물질 규명 중간보고'(右). (자료= 국가기록원 제공) 2021.06.08.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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