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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언의 책과 사람들] 손때 탄 책에 담긴 추억…‘북의 예술인’

등록 2023.01.28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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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북의 예술인 (사진=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 제공) 2023.01.18.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북의 예술인 (사진=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 제공) 2023.01.18.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서울 용산에 있던 사무실을 집 근처인 경기 남양주로 옮겼다. 2020년 1월 인테리어 공사를 마치고 이삿짐을 조금씩 나르기 시작했고, 2월 한달은 축하손님을 치르느라 바빴다.

내가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 근대서지학회 소속 여러 선생님들도 이전을 축하하기 위해 새로운 사무실을 찾아 주었다. 자연 그날은 내가 가진 책들을 공개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다들 책에 대해 일가견을 갖고 있는지라, 2018년에 북한 책 전시 ‘평양책방’을 개최한 적이 있는 내가 어떤 책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 하며 서가를 훑어보았다. 선생님들은 내가 소장한 희귀한 북한 책들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바탕 책 구경을 마치고 인근 구리농수산물시장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오랜만에 다 같이 모인 자리라 모두 할 말이 많이 남은 듯했다. 근대서지학회 사무실이 있는 서울 송파에서 술자리가 이어졌다. 내내 책과 책을 만든 사람들 이야기로 화기애애했다. 다들 얼큰하게 취하고 나서야 술자리가 파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술을 마시지 않은 나는 학회 부회장이자 야구전문기자로 명성이 높은 홍윤표 선생님을 집까지 모셔다 드리기로 했다.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해 야구기자로 전성기를 보낸 홍 선생은 인터넷신문 오센(OSEN)을 창업하는 등 오랫동안 언론계에서 주목할 만한 활동을 했다. 그래서인지 홍 선생은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야구와 언론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공통 관심사인 고서와 관련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재밌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서로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홍 선생은 나를 집으로 초대해 장서를 구경시켜주겠다고 했다. 웬만큼 친분이 있어도 집안에 손님을 들이는 것을 꺼리는 요즘인데, 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내 장서를 둘러본 답례로 자신의 장서를 보여주고 싶어했다. 나는 홍 선생의 후의를 거절할 수 없어 실례인지 알면서도 늦은 밤 그의 집을 찾았다.

홍 선생 역시 천생이 장서가인지라, 그의 책장은 흥미로운 책들로 가득했다. 그 중 눈에 들어온 책이 이철주가 쓴 ‘북의 예술인’(계몽사, 1966)이었다. 내가 석사 논문을 쓸 때 자료를 찾으러 들렀던 광화문 북한자료센터에서 복사 제본된 것을 발견하고는 단숨에 읽었던 책이다.

이 책은 월북 작가와 예술인들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마치 눈앞에 펼쳐놓듯 묘사하고 있다. 황해도 출신으로 1950년대 초 북한 민청기관지 ‘민주청년’의 문화예술부장, 국립출판사 문학예술부장 등을 역임한 이철주가 썼다. 그는 1957년 대남 공작활동을 위해 월남했다가 귀순한 이후 오랫동안 남한 사회에서 북한 공산체제에 대해 증언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북한 문화예술계의 중심부에서 활동했기에 월북 작가, 예술인들의 북한 생활에 대해 소개하는 문필활동을 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1000회 이상 각본을 쓴 ‘김삿갓 방랑기’와 같은 반공 드라마가 대표작이다.

서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반갑게 집어 들자, 홍 선생은 이 책을 내게 선물로 주었다. 그렇게 지니게 된 내 ‘북의 예술인’에는 그날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처럼 책에도 마치 나이테 같은 기억의 흔적들이 하나씩 늘어나고, 보다 더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생긴다. 이런 책을 가까이 소장하며 어루만질 수 있다는 것은 장서가만의 특권인지도 모르겠다.

▲한상언 영화연구소대표·영화학 박사·영화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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