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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정유 공정 뒤집은 역발상…끓이지 않고 원유 거르는 분리막 韓 연구진이 개발

등록 2026.06.25 00:00:00수정 2026.06.25 00: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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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상온에서 원유 성분 정밀하게 걸러내는 '고분자 분리막' 세계 최초 개발

350도 끓이던 정유 공정 혁신…에너지 31.6% 아끼고 이산화탄소 배출 37.6% '뚝'

130기 원전 1년치 전력 소모하는 정유 산업 대전환…'네이처'지 게재

[서울=뉴시스]선택층 없이 원유를 거르는 상온 분리막 – 스스로 만들어진 나노 통로로 에너지·탄소를 줄인다. (사진=과기정통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선택층 없이 원유를 거르는 상온 분리막 – 스스로 만들어진 나노 통로로 에너지·탄소를 줄인다. (사진=과기정통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심지혜 기자 = 국내 연구진이 100년 넘게 정유 산업을 지배해 온 '원유 끓이기(증류)' 공정을 대체할 파괴적 혁신 기술을 개발했다. 원유를 350도 이상의 고온으로 끓이지 않고, 상온에서 체로 치듯 찌꺼기를 걸러내는 차세대 분리막 기술이다. 정유 공장의 에너지 소비와 온실가스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어 탄소중립 실현의 핵심 열쇠가 될 전망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KAIST 생명화학공학과 고동연 교수 연구팀이 값싼 고분자 막만으로 상온에서 원유를 정밀하게 걸러내는 데 성공했다고 23일 밝혔다. 이번 연구 성과는 과학계 최고 권위 학술지인 '네이처(Nature)'에 게재됐다.

원전 130기 먹어 치우는 증류탑…'끓이기' 패러다임의 한계

전 세계 정유 공장은 원유를 350도 이상으로 끓인 뒤, 성분마다 끓는점이 다른 특성을 이용해 나프타, 휘발유, 등유, 디젤 등을 분리한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에너지와 냉각수가 들어가고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가 뿜어져 나온다.

실제 전 세계 정유 공장이 원유를 분리하는 데 쓰는 에너지는 연간 1100TWh(테라와트시) 이상이다. 이는 대형 원자력 발전소 약 130기가 1년 내내 쉬지 않고 만들어야 하는 엄청난 전력량이다. 전 세계 전력 생산량의 4%에 달한다. 여기서 나오는 이산화탄소만 매년 1억6000만톤이 넘는다.

학계는 바닷물에서 소금을 빼내 식수를 만들 때 끓이는 대신 '필터(역삼투 분리막)'를 쓰는 것처럼, 정유 공정에도 분리막을 도입하려 애썼다. 하지만 원유처럼 수천 가지 물질이 섞인 복잡한 액체를 분자 단위로 거르는 필터를 대량 생산하는 것은 기술적 한계에 부딪혀 초기 연구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서울=뉴시스]KAIST 생명화학공학과 고동연 교수 연구팀이 원유를 값싼 고분자 막만으로 상온에서 정밀하게 걸러내는 데 성공했다. 기존 증류탑 앞에 분리막을 붙여 원유를 먼저 걸러내는 방식이다. 이는 그동안 단순한 받침대로만 여겨졌던 다공성 고분자(PAN) 막만 활용하면서 가능해졌다. (사진=과기정통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KAIST 생명화학공학과 고동연 교수 연구팀이 원유를 값싼 고분자 막만으로 상온에서 정밀하게 걸러내는 데 성공했다. 기존 증류탑 앞에 분리막을 붙여 원유를 먼저 걸러내는 방식이다. 이는 그동안 단순한 받침대로만 여겨졌던 다공성 고분자(PAN) 막만 활용하면서 가능해졌다. (사진=과기정통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값싼 플라스틱 받침대의 반란…상식 뒤집은 역발상

고동연 교수팀은 기존 분리막 연구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집었다. 그동안 학계는 정밀한 분리를 위해 분리막 표면에 비싸고 얇은 '기능성 코팅층'을 입혀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코팅은 면적이 넓어지면 쉽게 찢어지거나 결함이 생겨 공장에 적용하기 어려웠다.

연구팀은 실험실용 모조 용액이 아닌 실제 정유 현장의 거친 원유를 가공 없이 필터에 그대로 흘려보냈다. 이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비싼 코팅층을 아예 걷어내고, 그동안 단순한 받침대로만 여겼던 값싼 다공성 고분자(PAN) 막만 써도 원유가 완벽하게 걸러진 것이다. PAN은 의류 등 합성섬유에 흔히 쓰이는 아주 저렴한 플라스틱 소재다.

비결은 원유와 소재의 자발적인 상호작용에 있었다. 원유가 분리막을 통과할 때, 무거운 찌꺼기 성분들이 필터 구멍 벽면에 자발적으로 들러붙었다. 그러자 머리카락 굵기의 5만분의 1 크기인 2nm(나노미터) 이하의 초미세 통로가 스스로 형성됐다. 원유 스스로가 자신에게 딱 맞는 맞춤형 '분자체'를 만들어 낸 셈이다.

보통 필터에 기름때가 끼는 현상은 성능을 떨어뜨리는 '오염'으로 취급된다. 연구팀은 이를 역으로 이용해 완벽한 차단벽으로 활용했다. 이 미세한 통로를 통해 가벼운 휘발유 성분 등은 초고속으로 빠져나가고, 무거운 찌꺼기는 뒤로 남았다. 이 방식은 기존에 개발된 세계 최고 수준의 원유 분리막보다 분리 속도가 23배나 빨랐다. 한 달 동안 연속으로 작동시켜도 끄떡없는 안정성까지 증명했다.

공장 설비 그대로 적용…연간 자동차 400만 대 분 탄소 절감

이번 기술의 가장 큰 장점은 정유 공장의 기존 증류탑 바로 앞에 이 분리막 장치를 '스냅인' 형태로 끼워 넣을 수 있다는 점이다. 분리막으로 원유를 먼저 가볍게 걸러낸 뒤 맑아진 액체만 증류탑으로 보내 끓이면 공장의 부담이 획기적으로 줄어든다.

연구팀이 공정을 시뮬레이션한 결과, 기존 증류 공정보다 에너지는 31.6%, 냉각수 사용량은 20.7%,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37.6% 감소했다. 공장 운영비도 36.0%나 아낄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이 기술을 국내 정유 및 석유화학 산업 전체에 도입하면 연간 약 1000만톤의 온실가스를 줄일 수 있다. 이는 승용차 400만대가 1년 동안 뿜어내는 탄소량과 맞먹는 규모다. 나아가 폐플라스틱을 녹인 열분해유 정제나 배터리 용매 회수 등 탄소중립 핵심 공정에도 바로 적용할 수 있다.


내 연구진이 원유를 350도 이상으로 끓이지 않고 상온에서 걸러내는 차세대 분리막 기술을 개발했다. 기존 증류탑 앞에 분리막을 붙여 원유를 먼저 걸러내는 방식이다. 선택층이 필요하다는 기존 분리막 연구의 상식을 뒤집고 단순한 받침대로만 여겨졌던 다공성 고분자(PAN) 막만 활용해 개발했다. (사진=과기정통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내 연구진이 원유를 350도 이상으로 끓이지 않고 상온에서 걸러내는 차세대 분리막 기술을 개발했다. 기존 증류탑 앞에 분리막을 붙여 원유를 먼저 걸러내는 방식이다. 선택층이 필요하다는 기존 분리막 연구의 상식을 뒤집고 단순한 받침대로만 여겨졌던 다공성 고분자(PAN) 막만 활용해 개발했다. (사진=과기정통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상용화까지 3~5년…원유 다변화와 대면적 검증 남았다

기존 정유 설비를 통째로 바꿀 필요가 없어 상용화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진짜 공장에 투입되기까지 해결해야 할 과제도 있다. 중동, 미국 등 산지마다 점도와 성분이 다른 원유를 대량으로 투입했을 때도 필터가 막히지 않고 장기간 버티는지 검증해야 한다. 이번 초기 연구는 HD현대오일뱅크가 제공한 아라비안 원유를 바탕으로 진행됐다.

실제 산업 현장에 쓰이려면 실험실 수준보다 최소 100배 이상 넓은 대면적 분리막 제조 기술도 완성해야 한다.

고동연 교수는 "이번 연구는 분리막이 혼합물과 만나 스스로 최적의 분리 통로를 빚어낸다는 새로운 과학적 원리를 규명해낸 성과"라며 "원유 분별을 넘어 나프타·방향족 분리, 폐플라스틱 재활용, 배터리 소재와 의약품 생산 공정 등 다양한 산업 분야로 응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 향후 국산 분자 정유 플랫폼 기술로 확장될 가능성도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공동 교신저자인 이재우 KAIST 교수는 "향후 국내 정유 공장 곳곳에 바로 끼워 넣을 수 있는 대형 모듈화 기술과 장기 운전 기술을 완성하겠다"며 "100년간 증류탑이 지배해 온 정유 산업의 패러다임을 한국의 분리막 기술로 완전히 바꾸겠다"고 포부를 나타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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