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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아이즈]칼럼 '고봉진의 에세'-《쿠오레》

등록 2012.11.05 16:46:41수정 2016.12.28 01:3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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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고봉진 뉴시스 상임고문.

【서울=뉴시스】우리나라는 물론 주변나라에 내셔널리즘이 심상치 않다.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를 사랑하고, 같이 자란 형제를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라는 말로 같이 묶일 수 있는 여러 범주의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같이하고, 이해를 같이하며 함께 살아간다. 그러므로 누구나 자기나라를 사랑하고 자기국민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 사랑은 애써 내세우거나 유별나게 떠벌릴 필요가 없는 것으로, 공기처럼 모든 사람이 그 속에서 숨쉬고 생활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오지 않는, 우리와 다른 ‘남들’이 언제나 저 쪽에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도 그들만의 ‘우리’를 우리와 같이 자연스럽게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최근에 초등학교 때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던 아미치스(Edmondo De Amicis 1846-1908)의 《쿠오레(Cuore)》라는 책을 다시 읽었다. 왜 그렇게 감명을 받았는지 재확인하고 싶어서다.

 책 이름인 이탈리아어 ‘Cuore’는 영어로는 ‘Heart’이다. 즉 우리말로는 심장, 마음, 사랑으로 옮길 수 있으나 이 경우는 ‘사랑’이 된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 엔리코가 1년 동안 학교를 다니며 쓴 일기형식으로 구성된 책인데, 그 속에 나오는 것은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스승과 학우들과의 사랑,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들과의 사랑, 그리고 나라와 동포에 대한 사랑 등 온통 ‘사랑’ 이야기로만 채워져 있다.

 아미치스가 태어나고 1년 4개월이 채 안된 1848년 2월에는 인류 역사 상 많은 영향을 끼친 두 사건이 일어난다. 첫 번째는 런던에서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이 발표된 것이고 두 번째는 파리에서 ‘2월 혁명’이 발발한 것이다.

 1840년대의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의 급격한 진전으로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수공업자가 몰락하는 가운데 도시인구는 급격히 증가하여 대중의 빈곤화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번지고 있었다. 마르크스는 이 선언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투쟁으로 자본주의사회는 붕괴할 것이고 공산주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도시 빈민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났던 파리의 2월 혁명은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헝가리, 이탈리아 등으로 파급되면서 빈 체제를 붕괴시키고 전 유럽을 뒤흔들었지만, 이 공산당선언은 그 경과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도 못했다.

 오히려 이 혁명은 각국의 내셔널리즘을 폭발적으로 고양시켜 이탈리아의 통일왕국 성립과 프러시아에 의한 독일의 통일을 촉진하게 된다. 이탈리아는 서기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래 1300여 년 동안, 지중해에 돌출해 있는 하나의 반도와 그것에 딸려있는 몇 개의 섬으로 구성된 지역 이름이었지 국가 이름은 아니었다. 그 오랜 고정관념을 뒤집는 일이 일어났다. 1861년에 사르데냐 왕국이 주축이 되어 베네토(Vèneto)와 로마 교황청 직할지를 제외한 전 이탈리아의 통일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열렬한 내셔널리즘의 성과였다.

 이러한 통일운동시대에 자란 아미치스는 1860년 14세가 되었을 때,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영웅 가리발디가 조직한 ‘붉은 셔츠 대’에 지원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뒤에 1866년 이탈리아군 포병장교로 오스트리아 군을 상대로 한 제3차 독립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곧 군을 떠나 저널리스트가 되고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1886년 《쿠오레》 출간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둔다. 책은 40회나 재판이 되고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이 되었다.

 그리고 10년 뒤인 1896년 아미치스는 이탈리아 사회당에 입당했다. 그때의 사회당은 급진적이었다. 이미 그의 작품에는 내셔널리즘과 함께 사회주의에 대한 편향이 짙게 나타나 있었는데, 그의 입당은 그가 내셔널리즘보다는 무산자 문제 해결을 더 우선시 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지향한 목표는 가난한 노동자에 대한 ‘쿠오레’만으로 충분히 실현해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의 말년은 《쿠오레》를 저술할 때 어린 학생으로 많은 영감을 제공해 주었던 사랑하는 아들 푸리오(Furio)의 자살로 비탄 속에 마감되었다.

 수필문우회 회장·뉴시스 상임고문 [email protected]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301호(11월6일~12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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