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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뮤즈보다 예술가 되고싶었던 그녀, 영화 ‘마리 크뢰이어’

등록 2013.06.10 07:51:00수정 2016.12.28 07:3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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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김태은 문화전문기자 = 작년 여름 덴마크 최북단 마을 스카겐에 들른 적이 있다. 연한 청회색의 신비하고 독특한 하늘빛, 뭉게구름이 그림처럼 살짝 떠 있고, 바람이 몰아치는 황야와 황록색 덤불이 삐죽삐죽 자란 모래언덕, 카데가트 해협과 스카게라크 해협이 마주치는 반도의 바닷가가 인상적이었다.  tekim@newsis.com

※이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서울=뉴시스】김태은 문화전문기자 = 작년 여름 덴마크 최북단 마을 스카겐에 들른 적이 있다. 연한 청회색의 신비하고 독특한 하늘빛, 뭉게구름이 그림처럼 살짝 떠 있고, 바람이 몰아치는 황야와 황록색 덤불이 삐죽삐죽 자란 모래언덕, 카데가트 해협과 스카게라크 해협이 마주치는 반도의 바닷가가 인상적이었다.

 중심가는 주황색 지붕에 짙은 겨자색으로 벽을 칠한 덴마크식 집들로 들어찼다. 지금까지 가본 그 어떤 곳에사도 보지 못한 자연 환경과 풍경이다. 여기에 매료된 북유럽 미술가들이 19세기 후반 이곳으로 모여들어 ‘스카겐 화파’를 탄생시켰다. 이들 화가가 화폭에 담아낸 그림은 어떠했을까. 다 둘러볼 시간이 없어 기나긴 아쉬움으로 남았다.

 ‘정복자 펠레’(1987)와 ‘최선의 의도’(1992)로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두 차례 수상한 빌레 아우구스트(65·우리나라에서는 영어식 발음 ‘빌 어거스트’로 알려진) 감독이 오랜만에 고국 덴마크로 돌아와 이 시대 화가 중 한 명을 조명했다. 독일계 부모를 둔 마리 크뢰이어(Marie Krøyer 1867~1940)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지난해 9월 덴마크에서 개봉한 ‘마리 크뢰이어’는 그녀의 일대기나 예술가로서의 삶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스카겐 화파의 대표적 작가로 손꼽히는, 노르웨이 태생 남편 피더 세브린 크뢰이어(1851~1909)와의 결혼 말년과 죽음, 스웨덴 작곡가 휴고 알벤(1872~1960)과 불륜을 저지른 20세기 초 몇년 간을 담고 있다.

【서울=뉴시스】김태은 문화전문기자 = 작년 여름 덴마크 최북단 마을 스카겐에 들른 적이 있다. 연한 청회색의 신비하고 독특한 하늘빛, 뭉게구름이 그림처럼 살짝 떠 있고, 바람이 몰아치는 황야와 황록색 덤불이 삐죽삐죽 자란 모래언덕, 카데가트 해협과 스카게라크 해협이 마주치는 반도의 바닷가가 인상적이었다.  tekim@newsis.com

 전기에 따르면, 예술에 관심이 많던 마리는 화가가 되고자 했으나 여자가 이런 교육을 받기에는 어려움이 큰 시대였다. 그래도 재능과 의지가 있던 그녀는 부모의 지원을 받아 코펜하겐과 파리에서 그림을 배워 1888년 화가로 등단한다. 그러나 이듬해 16세 연상의 피더 세브린 크뢰이어와 결혼하면서 주로 그의 아내, 모델로서 살아가게 된다.

 영화는 이 지점에 주목한다. 남편의 그림 속에서 그녀는 ‘덴마크 최고 미인’, 더 나아가 ‘유럽 최고 미인’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성공한 유명 화가인 남편의 지도를 받으며 딸을 낳고 행복한 생활을 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한 꺼풀 벗겨보면 정신병에 시달리는 남편의 언어적, 육체적 학대에 시달리며 부부생활도 만족스럽지 않다. 그의 기행은 아이를 괴롭히는 데까지 이른다.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는데, 비밀을 지키며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하는 것이 마리의 몫이다. “여자는 남자를 찾는 것”이 전부로 여겨지던 시대, 자의식이 뚜렷했던 그녀는 ‘뮤즈’에 그치고 싶지 않았다.

 친구와 스웨덴으로 여행을 떠난 마리는 그곳에서 친구의 혼외정사 상대였던 휴고 알벤과 사랑에 빠진다. 당대 관습과 법률로는 이혼도 어렵고, 여성이 단독으로 아이의 양육권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시피 했다.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1878)의 주인공이나 영국 영화 ‘공작부인: 세기의 스캔들’(2008)의 주인공인, 고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선조이기도 한 조지아나 스펜서(1757~1806)처럼 그녀는 사랑과 모성애 사이에서 피눈물 나는 갈등을 겪어야했다.

 영화는 결국, 휴고 알벤의 딸을 낳은 후 다시 돌아온 그의 청혼을 받지만 이를 거절하고 갓난아기를 안고 떠나는 마리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그녀가 자신의 삶, 예술가로서의 길을 찾아가는 상징이다. 하지만 아이 딸린 여성이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기는 어려운 시대였다.

【서울=뉴시스】김태은 문화전문기자 = 작년 여름 덴마크 최북단 마을 스카겐에 들른 적이 있다. 연한 청회색의 신비하고 독특한 하늘빛, 뭉게구름이 그림처럼 살짝 떠 있고, 바람이 몰아치는 황야와 황록색 덤불이 삐죽삐죽 자란 모래언덕, 카데가트 해협과 스카게라크 해협이 마주치는 반도의 바닷가가 인상적이었다.  tekim@newsis.com

 실제로 마리는 스웨덴의 작은 마을에서 직접 설계하고 인테리어한 집을 짓고 알벤과 동거했다. 1912년 공식적으로 결혼했지만 1936년 이혼한다. 이 시기 수채화와 드로잉, 인테리어 장식 등을 창작했다. 뒤늦게나마 자신의 재능을 펼쳐보이며 산 것이다.

 남자인 감독은 타이틀롤인 마리 크뢰이어의 능력과 고뇌에 공감하기 어려웠던 것일까. 그의 애정은 주로 피더 세브린 크뢰이어의 천재성과 예술성을 향해 있다. 실질적으로 그가 더 유명하고 세상의 인정을 받은 화가이긴 하지만 그의 눈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는 마리는 “재능이 없어 그림을 포기해야 행복해질”, 그래서 그의 아내로 머물렀어야할뿐인 존재다. ‘글루미 선데이’(1999) 같은 삼각관계를 허용하면서까지 붙잡고 싶어했던 마리의 매력이나 특별함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당시의 예술 풍조에 조예가 있는 관객이라면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크뢰이어가 빛의 변화와 그 효과에 집착하는 모습, 노르웨이 극작가 입센의 사상, 예술지상주의적 트렌드 등을 즐길 여지가 있다. 또 아우구스트 감독은 더크 브륄 촬영감독과 오랜 시간 크뢰이어의 그림을 연구하며 그림 속의 빛을 재현하고자 했다는데, 그 햇살의 느낌이 반영된 화면과 세심하게 복원된 20세기 초 북유럽의 양식과 의상을 보는 재미도 크다.

 하지만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예술가들이기 때문에 별다른 설명이 없는 신들의 나열에 몰입하기에는 다소 지루한 면이 있다. 아우구스트 감독은 나이가 들어가며 ‘절제’를 최우선 덕목으로 두기로 한 듯 보인다. 격정적이기보다는 선을 넘지않는 감정의 제어를 선택해 흐름이 끊기는 듯한 느낌이 종종 든다. 국내 관객의 취향에 맞을는지는 잘모르겠다. 한편의 아름다운 명화를 보는 듯한 품격을 지키려고 한 것 같은데, 그 잔잔한 성숙함이 예술적 열정과 한 여인의 삶에의 도전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서울=뉴시스】김태은 문화전문기자 = 작년 여름 덴마크 최북단 마을 스카겐에 들른 적이 있다. 연한 청회색의 신비하고 독특한 하늘빛, 뭉게구름이 그림처럼 살짝 떠 있고, 바람이 몰아치는 황야와 황록색 덤불이 삐죽삐죽 자란 모래언덕, 카데가트 해협과 스카게라크 해협이 마주치는 반도의 바닷가가 인상적이었다.  tekim@newsis.com

 마리 크뢰이어 역의 덴마크 여우 비르기트 요르트 소렌슨(31)는 브리지트 바르도를 연상시키는 육감적인 입술과 풍만한 몸매가 인상적인 배우다. 국내 케이블TV에서도 방송된 덴마크 인기 드라마 ‘여총리 비르기트’에도 출연했다. 순정해 보이면서도 깊이 있는 눈빛을 지닌 실제의 마리와 이미지가 다를뿐더러, 연기도 별로 설득력이 없다.

 행복지수, 양성평등지수가 세계 최고수준인 현재의 덴마크에서 사는지라 자아실현을 위해 몸부림치는 지난 세기의 여성의 번뇌가 별로 와닿지 않은 것이었을까, 하는 상념이 문득 들었다. 청소년관람불가, 13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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