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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국영화 페르소나였다…영화로 산 안성기의 70년

등록 2026.01.05 09:3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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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국영화 페르소나였다…영화로 산 안성기의 70년


[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드라마·뮤지컬·연극은 단 한 편도 하지 않았다. 영화로 데뷔해 영화만 하다가 영화를 남기고 5일 우리 곁을 떠났다. 배우 안성기(74)는 누가 뭐래도 무비스타였다. 70년 영화 인생이 한국영화 역사였고, 오랜 세월 그 흔한 구설 하나 없이 선후배 귀감이 돼 국민배우라는 유일무이한 타이틀을 받은 한국영화의 상징이었다.

◇오직 영화만 140여편…"이건 내 운명이었다"

안성기는 다섯살이던 19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로 데뷔했다. 학업과 군대 그리고 잠시 거친 회사원 생활 약 10년을 빼고 온 삶을 영화로 살았다. 그는 생전 연기 활동에 대해 "부모님 뜻도 아니었고 내 뜻도 아니었다. 그냥 운명적으로 시작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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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의 70년 영화 인생은 크게 세 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데뷔 후 1968년 '젊은 느티나무'까지 아역배우 시절이 1기, 10여년 공백 끝에 다시 영화계로 돌아와 '바람불어 좋은 날'(1980)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 '고래사냥'(1984) '칠수와 만수'(1988) '태백산맥'(1994) 등 주로 사회파 영화에 출연한 1980년대와 1990년대 중반까지가 2기, '투갑스'(1993)를 시작으로 '실미도'(2003) '라디오스타'(2006) '신의 한 수'(2014) 등 주류 상업영화에서 주로 활약한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까지가 3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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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남긴 영화는 약 140편. 안성기는 2017년 데뷔 60주년 특별전 기자회견에서 "한눈 팔지 않고 영화에 매진했다. 극장을 찾아가 객석에 앉기까지 귀찮은 과정을 거쳐 찾아오는 관객들에게 고마움이 있다. 컴컴한 곳에서 날 감동시켜달라는 마음을 갖고 앉아 있는 관객이 참 소중하다. 그래서 영화를 좋아한다"고 했다. 2019년 뉴시스와 인터뷰에선 "영화 현장을 너무 사랑하다보니 영화를 끊임없이 계속하고 싶은 염원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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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의 페르소나

안성기는 특정 감독의 페르소나를 넘어 한국영화의 페르소나였다. 임권택·배창호·이장호·이두용·정지영·이준익·강우석·이명세 등 한국영화 대표 감독들과 수십년 간 함께했고, 한국영화 변곡점마다 그가 있었다. '바람불어 좋은 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성장시대 한국 사회 그림자를 담아내며 한국영화 사회비판리얼리즘을 대표했다. '고래 사냥'은 억압적인 시대에 대한 반항의 상징과도 같은 청춘영화였다. '투캅스'(1993)는 한국형 형사버디물의 출발점이자 블랙 코미디 영화의 전성기를 열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는 한국영화 스타일을 한 단계 격상했다. '실미도'(2003)는 1000만 관객 문을 열어젖힌 한국영화 흥행의 새 이정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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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는 "이 길로 들어서면서 배우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었다. 존중 받고, 동경했으면 했다.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다. 작품 하나 하나 선택할 때마다 신중했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하게 담긴 작품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적은 없지만 탁월한 연기력에 그가 가진 상징성과 영향력이 더해지며 각종 영화에서 남긴 명대사가 남녀노소 불문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날 쏘고 가라"(실미도) "그게 재판입니까, 개판이지"(부러진 화살)는 온갖 패러디를 낳은 말이었다. "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거의 없어. 다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거야"(라디오스타)는 한국영화 명대사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안성기와 박중훈이 만들어낸 빗속 결투 장면은 한국영화 명장면을 꼽을 때 빼놓을 수 없는 신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영화 페르소나였다…영화로 산 안성기의 70년


◇나서길 꺼리던 무비스타…한국영화 위한 일엔 앞장

안성기는 성인 연기자가 되고 나서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에 걸쳐 각 시대를 아우르며 모두 연기상을 품에 넣은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배우이기도 하다. 대종상·백상예술대상·청룡영화상·영평상 등 각종 시상식에서 그가 거머쥔 트로피만 40개가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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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한국영화 최고 스타였지만 나서길 싫어하고 주목 받길 꺼리는 소탈한 성격을 가진 배우이기도 했다. 다만 그는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서는 언제든 앞장섰다. 2000년부터 스크린 쿼터 수호천사단 단장을 맡고, 2006년에는 스크린쿼터 비상대핵위원회 공동위원장을 하는 등 한국 영화계에 주요 사안이 있을 때마다 힘을 보탰다. 안성기는 "다른 일에 관해서는 뒤로 빼는 편이다. 하지만 영화에 관한 일이라면 앞장서는 편이었다. 스크린 쿼터 폐지 반대 시위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나서서 무언가를 외치는 걸 너무 너무 힘들어 하지만 그때는 나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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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말을 아끼는 배우였지만 한국영화가 옳지 못한 방향으로 간다고 느낄 땐 죽비를 내리치는 일도 망설이지 않았다. 안성기는 한국영화가 관객수로 정점을 찍었던 2019년 뉴시스와 인터뷰에서 "영화가 오락적으로 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내가 영화를 시작할 때는 영화를 통해서 사회를 발전시키려고 하는 작품들이 굉장히 많았다. 주제도 무겁고 진지했다. 그래서 최근에 영화가 너무 오락적으로 가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있다. 오래 해왔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 게다. 예전에는 영화 '감상'이라고 했다. 이제는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너무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뤘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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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수식어 국민배우

영화와 연기 그 자체로 거둔 성취는 물론이고 겸손한 인품과 구설 하나 없이 완벽에 가까운 자기관리로 영화계를 넘어서 존경을 받은 배우이기도 했다. 어떤 뛰어난 연기력을 가진 배우도 달지 못한 국민배우라는 수식어를 이름 앞에 둘 수 있었던 것도 안성기가 자신의 인생으로 보여준 인격자로서 행보 때문이었다. 1980~90년대 한국 최고 흥행 배우이자 안성기와 함께 '투캅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라디오스타' 등을 함께한 박중훈은 수 차례 "안성기 선배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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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생전 국민배우라는 타이틀과 모범적 생활에 대해 "배우들의 이미지가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산 측면도 있다. 노력했다. 또 성격 자체가 그런 측면도 있었을 거다. 안 그랬다면 피곤해서 살겠나. 그 타이틀에서 굳이 벗어나야 할 이유는 없다. 배우로 연기로 잘 살면 되는 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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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는 국민배우라는 말에 대해 농담을 섞어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전 국민배우가 맞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전 팬클럽도, 극성 팬도 없거든요. 전국민이 팬이라고 생각해요. 미소로 인사하면서 지나가는 분들, 그 분들이 제 팬이죠. 참 고맙습니다. 확 타오르는 건 없지만 은은한 온기를 보내주시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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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연기하고 싶다"고 했는데…

안성기는 2019년 혈액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 어떤 젊은 배우보다 연기를 향한 열망을 강하게 드러냈다. 그는 "'이 정도 했으니까 쉬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고 했다. 이전에 하지 않았던 독특한 장르영화에 출연할 때는 "어린 친구들은 이제 나를 잘 모른다. 나이 든 사람한테 관심을 잘 주지도 않는다. 이 영화를 통해 아직도 젊은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기대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영화 페르소나였다…영화로 산 안성기의 70년


그는 오래 연기하는 게 꿈이라고도 했다. 자신이 오래 연기해서 후배들의 정년을 늘려주고 싶다고 했다. "나이 먹었어도 에너지를 보여주고 싶어요. 관객에게 노쇠함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오래고 싶은 이유는 제 뒤에 있는 후배들 때문이기도 해요. 영화계에 제 또래가 남아있지 않아요. 어떤 때는 굉장히 외롭습니다. 후배들의 정년을 늘리는 역할을 제가 해야죠."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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