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략·지배' 명시한 사죄 담화…무라야마, 日 외교의 기준점 만들어
'무라야마 담화' 일본 정부 공식 역사 인식의 기준점
![[도쿄=AP/뉴시스] 1995년 8월 15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전후 50주년을 맞아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하기 직전 기자들 앞에 선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일본 총리의 모습. 2025.10.17.](https://img1.newsis.com/2025/10/17/NISI20251017_0000722391_web.jpg?rnd=20251017155227)
[도쿄=AP/뉴시스] 1995년 8월 15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전후 50주년을 맞아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하기 직전 기자들 앞에 선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일본 총리의 모습. 2025.10.17.
[서울=뉴시스]임철휘 기자 = "식민지 지배와 침략으로 많은 나라들 특히 아시아 제국의 여러분들에게 큰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미래에 잘못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와 같은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서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하며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합니다. 또 이 역사로 인한 내외의 모든 희생자 여러분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바칩니다."
1995년 8월 15일, 종전 50주년을 맞아 발표된 이른바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 정부가 처음으로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명시하며 피해국 국민에게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공식 표명한 선언이었다.
전후 일본 정치에서 국가의 전쟁 책임을 가장 명확히 인정한 문장으로 이후 한일 관계와 동아시아 외교의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담화는 일본 정부의 공식 역사 인식의 기준점이 되어, 1998년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에서도 그대로 인용됐다.
이 '사죄의 언어'를 남긴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가 향년 101세로 별세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무라야마 전 총리는 17일 오전 11시28분 고향인 규슈 오이타현 오이타시의 한 병원에서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워싱턴=AP/뉴시스] 1995년 1월 11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 앞서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이 선물한 워싱턴주산 사과 바구니를 들고 있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일본 총리의 모습. 2025.10.17.](https://img1.newsis.com/2025/10/17/NISI20251017_0000722392_web.jpg?rnd=20251017155113)
[워싱턴=AP/뉴시스] 1995년 1월 11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열린 공동 기자회견에 앞서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이 선물한 워싱턴주산 사과 바구니를 들고 있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일본 총리의 모습. 2025.10.17.
1924년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노동 조합 운동을 거쳐 1972년 중의원(하원) 선거에서 사회당 후보로 첫 당선된 뒤 8차례 의원으로 재임했다.
1994년 하타 쓰토무 내각이 불화로 붕괴한 뒤, 자민당은 신당 사키가케와 사회당에 연립정권 구성을 제안했고, 무라야마 전 총리는 이를 수용해 그해 6월 제81대 총리로 취임했다.
사회당 출신으로는 1947년 이후 47년 만의 두 번째였다.
총리 취임 직후 그는 시정연설에서 자위대를 합헌으로 인정하고, 미일안보체제 유지 방침을 밝혀 사회당의 기본 정책 노선을 180도 선회시켰다.
전후 50주년이던 1995년 8월 15일에는 일본의 전쟁 책임을 명확히 인정하고 '통절한 반성과 사죄'를 표명한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다.
이후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 정부의 공식 역사 인식의 기준점이 되어 이후 일본 정부의 공식 역사인식으로 계승됐다.
하시모토 류타로, 오부치 게이조, 고이즈미 준이치로, 아베 신조 등 역대 총리들도 이를 계승하겠다는 입장을 밝혔고 일본 국내외에서는 이들의 담화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무라야마 담화를 삼았다.
특히 아베 신조 전 총리는 2015년 전후 70년 담화에서 "우리나라는 지난 대전에서의 행동에 대해 반복적으로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의 마음을 표해 왔다"고 했는데, 무라야마 담화에 비해 후퇴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식민지 지배' '침략' '반성' '사죄'라는 핵심 키워드를 과거형으로 처리하고 주체를 명시하지 않은 채 제3자적 서술로 표현함으로써 본질을 흐렸다는 지적이다.
무라야마 전 총리는 "사람에게 다정한 정치"를 내걸고 피폭자원호법 제정, 미나마타병 환자 구제 등 사회적 약자 보호 정책에도 힘썼다.
그러나 재임 중 한신·아와지 대지진(1995년 1월), 옴진리교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 전일항공(ANA) 857편 납치 사건 등 대형 재난이 잇따르며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비판에도 직면했다.
1995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대패하자 그는 자민당 지도부에 사의를 전했으나 만류됐다. 이후 스스로 퇴진을 결심하고 1996년 1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퇴임 후에는 내각에 참여하지 않고 당무에 전념했으며, 사회민주당 초대 당수로 선출됐다.
1999년에는 초당파 대표단 단장으로 북한을 방문했고, 이듬해 중의원 해산과 함께 정계를 은퇴했다.
길게 늘어진 눈썹과 서민적인 성격으로 '톤짱'이라 불리며 국민에게 친근한 총리로 기억된다.
![[도쿄=AP/뉴시스] 사진은 1994년 10월 도쿄 아사카 주둔지에서 열린 일본 자위대 사열식에 참석한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일본 총리의 모습. 2025.10.17.](https://img1.newsis.com/2025/10/17/NISI20251017_0000722397_web.jpg?rnd=20251017155100)
[도쿄=AP/뉴시스] 사진은 1994년 10월 도쿄 아사카 주둔지에서 열린 일본 자위대 사열식에 참석한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일본 총리의 모습. 2025.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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